애가 애를 키웠다
첫째는 자신이 태어난 지 14개월 만에, 동생을 만나게 되었다. 육아서에서 본 내용과 달리, 첫째는 동생을 질투하지 않았다. 큰 아이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우리 부부는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사진 속에는 우는 모습, 열심히 숟가락질하는 모습, 나의 화장품을 망가뜨린 모습들 뿐만 아니라 동생을 예뻐하는 사진들도 많다. 그래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건, 엄마가 없을 때 동생 다리를 끌고 다니거나 여기저기 꼬집는 사례를 육아 프로에서 봤기 때문이다. 둘째 몸에 상처는 없는지 확인해 봤지만, 첫째는 진심으로 동생을 환영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동생이 기어 다니면 같이 기어 다니며 동생과 같은 곳을 보고 깔깔 웃었다. 혹은 기는 동생의 등위에 올라타서는 마치 악어 조련사처럼 굴기도 했다. 딱 동생이 웃음을 토해낼 정도로 말이다. 웃기만 하면 그게 아이일까 싶지만, 한 아이가 울면 따라 울던 때도 있었다. 연년생을 키우는 데 난관은 두 아이가 동시에 울 때다. 그러면 어린 엄마인 나도 같이 울어버렸다. 내 인생의 희로애락이 골고루 농축된 시절이다. 인생을 진하게 살고 싶지 않다. '희로애락 15% 함유'로 다소 밍밍한 맛으로 사는 게 내 꿈이다.
도로가에서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이집 다닌 지 이틀째인 둘째는 엄마 곁에서 얌전히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얼굴을 관심 있게 들여다 보고서, 말 한마디 건다면 왕 울어버릴 표정이다.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한 살 많은 첫째의 표정도 밝을 리 없다. 시한폭탄 울보 동생과 같이 어린이집을 가느니 혼자 가는 게 낫겠다는 표정이다. 전날도 노란 버스를 보고 동생은 울었으니, 둘째 날은 집을 나설 때부터 불안한 마음이 들었을 거다. 차라리 집에 데리고 있을까, 다섯 살에 집에 있는 건 또래보다 뒤처지는 것일까 양극의 고민을 했지만 난 다자녀의 엄마가 아닌가. 숨통이 필요했다. 27개월 막내를 등에 업고서 흘러내리는 포대기를 다시 고쳐 매야 했다. 멀리 노란 버스가 눈에 들어온다. 둘째의 동그란 눈에는 눈물이 차오른다.
둘째가 어린이집 버스를 타는데 의연해지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친구들과 놀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도 있었다. 첫째는 첫 사회생활에 분주함이 있었는지 손 빠는 버릇이 사라졌다.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손 빠는 걸 잊은 건지, 혹은 또래는 하지 않는 행동으로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지 아무튼 딸의 부르튼 하얀 엄지는 다른 손가락 색과 같아졌다.
두 딸의 첫 사회생활은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화장실 뒤처리도 미숙하나마 스스로 하려 했다. 소꿉놀이에도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엄마, 아빠, 딸의 한정적인 역할에서 선생님과 학생 역할도 추가되었다.
아이들의 소꿉놀이를 통해 어린 집 선생님을 상상하게 했다. 표정과 몸짓은 여자 아이들의 섬세함으로 다소 과장을 달고 재연하였으며 막내는 여전히 아기 역할을 하였다. 말이 트이기까지는 ‘아기 언어’가 원어민급이니 그 역할을 대체할 사람이 없었다.
막내는 사람을 좋아했다. 막내가 혼자 놀던 모습은 나의 기억에 별로 없다. 언니들이 어린이집을 가면 놀이 상대는 내가 되어야 했다.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엄마 책!” 짧은 두 단어를 외치면 바로 책을 읽어줘야 했다. 만일 청소기 소리에 요구사항을 듣지 못해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적극적으로 행패를 부렸다. 언니들과 확연히 다른 기질을 가진 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았다. 아이 목소리는 힘이 들어갔고 요구하는 것도 많았다. 아직 어려서 그럴 거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이런 아이의 표본이 없었다. 나의 형제 중에 내가 처음으로 결혼을 했기에 물어볼 데도 없었다.
‘그래 우선은 들어주자.’
그리고 나의 결심은 막내가 다섯 살이 되던 때에 바뀌었다. 남자아이를 키우면 엄마는 장군이 된다고 하더니, 딸을 키우며 그걸 깨우치고 있었다. 확실히 셋째는 빨랐다. 말은 또박또박 잘했고, 눈치도 워낙 빨랐다. 딸 셋을 키우는데 막내는 분명 아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걸 좋아했고, 아빠 면도날을 만지다가 손을 베기도 했으며 물엿 반통을 거실 바닥에 주욱 짜 놓기도 했다. 나는 변해야 했다. 딸의 탈을 쓴 아들이었으며 여자 아이의 눈치 빠름까지 갖춘 다섯 살을 응대하려면 말이다.
여리던 나의 목소리는 성량이 풍부해졌고, 아기 말투로 아이를 응대하던 나는 완벽한 어른 말투로 막내를 대했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비난을 받았다. 이웃에 살던 동네 언니는 막내에게 끌려 다니는 나를 보며 비관적인 미래를 예측했다.
“너 그러다가 나이 들면 막내에게 맞는 부모가 될 수도 있어.”
얼토당토않는 말이어서 어이가 없었다. 그 언니의 교육 방식은 아이들을 부모에겐 무조건적인 순종을 하도록 교육했다. 무서운 엄마여서, 아직은 힘이 없는 아이여서 순종하는 모습이었다. 교육관이 확실하게 서지 않던 나로선 흔들릴 법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이는 어리지만 설명하면 이해를 했고, 더디게라도 떼쓰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성향이 다른 세 자매는 만으로 십 대 후반을 보내고 있다. 막내는 만으로 하면 십 대 중반이라고 우기니, 십 대 중반이라고 말해주자. 작년까지만 해도 날 선 싸움을 하더니, 싸움은 잦아들었다. 눈치 없는 엄마는 딸들의 사춘기가 왔다가 간 건지 아예 오지 않는 건지 모른다.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회복되는 게 가족이었다. 금요일 저녁이면 세 자매는 완전체가 된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까르르르, 흐흐흐흐, 하하하하 웃는 소리도 제각각이다. 매해 느꼈다. 지난해보다 아이들은 성장했다고. 일요일 오후, 세 딸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 날 써 본다.
2020. 11. 23.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