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주던 인형, 안녕!

추억은 방울 토마토

by 게으른 산책가

드디어 인형을 버렸다.


방귀대장 뿡뿡이, 긴팔원숭이, 다리 부러진 강아지, 보들보들 푸우….


플라스틱 보관함에서 몇 년 보낸 세월 속에서도 인형들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인형을 보기 전에는 “이젠 버려도 돼.” 시원하게 허락했는데, 눈을 마주친 순간에는 인형마다 새겨진 추억을 끄집어냈다. 각자 인형을 대할 때마다, 매해 인형을 버리려 할 때마다 했던 말들이다.


내장산에서 내려오다가 외할아버지가 사주신 긴팔원숭이, 그날 막내는 간이 유모차를 타고 산을 탔던 날이다. 할아버지 덕분이다. 자신의 딸이 어렸을 땐, 분명 더 힘이 셌던 아빠는 그 에너지를 오로지 집안을 일구는 데만 썼다. 손녀를 본 노년에는 남은 힘을 사랑하는 데에 썼기에, 딸은 자꾸만 할아버지를 추억해냈다. 만약 내가 유모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걷기를 거부하는 다섯 살이라면, 아빠에게 엉덩이 몇 대는 맞았을지도 모른다. 고집불통 막내는 그 사랑을 고스란히 받아냈고, 자꾸만 할아버지를 추억해주니 난 눈물이 차 올랐다.


아침마다 보던 방귀대장 뿡뿡이, 세 자매가 이불속에서 한 곳을 바라볼 시간이었다. 작은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도 같은 곳을 바라봤다. 아이들이 웃을 땐 나도 따라 웃었다. 같은 마음이 스미도록 같은 곳을 바라봤다. 엄마들이 아이들의 눈만 마주쳐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챌 수 있는 건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뿡뿡이 배를 꾸욱 누르면 방귀가 나왔는데, 세탁기에 돌린 바람에 방귀 소리를 잃은 방귀대장이다. 어쩌면 옛날 일은 기억도 선명한지.



다리 잃은 강아지, 둘째는 움직이는 인형을 좋아했다. 건전지를 넣으면 건전지 세기만큼 달리던 강아지인데,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 막대를 대고 리본으로 감아줬다. 둘째는 다시 꺼내어 다친 다리를 매만졌다. 부러진 다리는 여전히 마음이 쓰였나 보다.


첫째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인형을 보지 않았다. 확실히 나이가 있어서인지, 다 버리라고 했다. 어제 버리는 일에 제일 적극적이었다. 하긴 첫째의 인형들은 이미 작년쯤에 이별식을 치렀다. 아빠가 사준 인형과 더불어 내가 ‘아가방’에서 사준 인형이었다. 아빠가 사 준 인형은 보드라운 곰돌이 인형이었다. 아이가 많이 안아주었고, 제일 가까운 곳에서 아이를 지켜봐 주었던 동그란 눈이 박힌 인형이다. 내가 사준 캥거루 인형은 피부에 자극이 없을 거라는 엄마표 생각이 얹힌 물건인데, 그다지 인기는 없었다. 비싸기만 했다.


어제 버리려다가 결국 다시 소생한 물건이 있다.


아홉살 둘째 그림


그림과 힘이 들어간 글씨를 보고 막내는 도저히 못 버린다고 했다. 이 녀석은 할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아서인지, 못 버리는 습관도 비슷하다.


일곱살 셋째 그림

무당벌레 얼굴이 몸통보다 크고 한 번도 보지 못한 곤충의 눈코 입은 일곱 살 손이 현미경이 되어 확대되었다. 잠자리와 해는 방긋방긋, 일곱 살 막내는 상당히 행복한 ‘일곱 살’을 보낸 거라 여기니 엄마 성적표는 꽤 괜찮지 않았나 자뻑해본다.


정리하느라 새벽 세 시에 잠들었다. 아침에 블라인드를 올리고, 정리한 구석구석을 다시 눈여겨본다. 버려질 물건은 베란다로 몰려있다. 난 그곳을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다시 소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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