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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Nov 30. 2021

오징어게임이 한국적이라고?





   0. 대답부터 먼저 하자면, YES.


<오징어게임>이 공개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오징어게임은 이미 식상한 소재가 되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인기를 끌었고 그와 동시에 영화 속 한국 전래놀이, 의상, 음악 등 영화 속 모든 요소들이 빠르게 소비되었다. 마침 핼러윈까지 맞물리면서 거리 행사나 코스튬에서도 오징어게임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을 기준으로, 문구점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징어게임 소품이 쌓여 있고 길거리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리코더로 오징어게임 속 음악을 연주하며 뛰어 다닌다. 아마존에서 달고나 만들기 세트가 비싸게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나 호주나 미국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인형이 서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영화가 가진 폭력성이나 잔인함, 서사와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오징어게임을 소비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오늘은 그 서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가 나왔고 너무 많은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 오징어게임에 대한 지금 이 이야기가 어느 누구에게도 이로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게임에 나온 ‘지극히 한국적인’ 서사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1. 빈부격차, ‘빈(貧)’ 영역의 목소리


오징어게임 이전부터 한국 영상 콘텐츠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이미 높아진 상태였다. 특히 많은 관심을 받았던 영화 <기생충>을 빼놓을 수 없다. 기생충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오징어게임의 주제가 일정 부분 유사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발생하는 빈부격차를 다양한 비유적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다.


다만 기생충이 양극의 대비를 보여준다면 오징어게임은 기생충 속 송강호 가족들의 삶을 들추는 모양새다. 이미 양극화와 불평등을 전제하고 그중에서 빈(貧) 영역의 삶, 패배로 간주되는 삶을 하나씩 들추며 그 삶들을 들여다보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삶들은 하나같이 필연적인 이유를 갖고 있다. 굳이 공정이나 선택이라는 단어를 갖고 와서 해명할 필요도 없고 제도적인 모순이나 기형적인 사회 구조 역시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오징어게임 속에서 이미 설정이 끝났다. 매 미션마다 주어지는 놀이와 공간의 제약은 ‘여기는 이런 곳’이라는 물리적 제한을 둔다. 그 세계에는 발버둥치는 개인들만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빈(貧)’의 목소리가 다층적으로 재현된다.


오징어게임  겹겹이 쌓인 ‘()’ 목소리는 매우 적극적으로 한국의 현실을 가리킨다.   개인들이 일차적으로 한국형 서사를 담보한다. 분단국가라는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한 여성 북한이탈주민이나 다문화사회를 표방하지만 여전히 기형적인 한국 사회 안에서  것으로 놓인 이주노동자의 . 서울대 수석이라는 엘리트 표식과 돈을 좇다 주저앉은 인물이나  말고는 가진  없는 여성. 구조조정에 따른 해고와 파업,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가족의 해체나 목사를 통해 보여주는 기독교 문제도 그러하다. 물론  인물들이 어떤 서사 분석을 요할 만큼 특별히 입체적이지는 않다. 인물에 대한 입체성이나 체계성을 분석하기 전에 그들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진부하다. 다만 한국인에게는 전혀 새로울  없는  납작한 인물들이 세계시장에서는 낯설고 생경한 인물이 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서구 콘텐츠에서 동양인이 유사한 패턴으로 반복, 재생산되어 왔다는 점에 비춰볼  오징어게임에서 드러나는 동양인, 좁게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특수성은 흥미로울  있다.

   


  2. 전래놀이와 연대 의식


앞서 언급한 인물들의 삶은 한국 전래놀이 무대로 옮겨지면서 더 생경하게 다가온다. 작품에 등장하는 놀이들은 어린아이들이 즐기는 쉽고 단순한 놀이이면서 바깥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한국의 전래놀이다. 게다가 이것은 참가자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참가자들은 미션마다 새로운 전래놀이에 참여한다. 그것은 본래 ‘시간 가는  모르게 재미있는 놀이’(오일남의 )이면서,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놀던 놀이’(상우의 )였다. 그러나 더이상은 그렇지 않다. 고작 달고나에 침을 묻히다가 총에 맞아 죽고 구슬을 치다가 총에 맞아 죽는 놀이의 반복은 놀이의 의미를 바꾼다. 보통의 놀이는 “휴식, 긴장완화를 위한 것이며 진지하며 책임을 요구하는 삶의 행동과는 달리    '명랑한 한가로움’”(김재철, 2013)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참가자들에게 놀이는 노동이자 비극이다. 그들에게 놀이는 더이상 긴장을 완화시키는 ‘명랑한 한가로움 아니다. 놀이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노동이며 목숨이 걸린 현실의 문제이자 살아남기 위한 의무다. 놀이의 규칙을 따르지 않거나 놀이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죽는다. 오징어게임에서 활용된 한국의 전래놀이는  자체로서도 낯설지만 기존 놀이의 의미를 전복한다는 데서  낯섦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 전래놀이의 역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전래놀이는 역설적으로 연대 의식을 불러들이는 데 기여한다. 누군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서로 마음을 나누고 ‘깐부’를 맺는다. ‘깐부’를 맺지 못한 한미녀는 한국 깍두기 문화의 수혜를 받는다. 또 약자를 제거하기 위해 혹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참가자들은 연대하도록 만든다. 줄다리기 게임에서는 성기훈을 중심으로 모두가 기피하는 노인, 여성과 연대한다. 그리고 그들은 강한 힘을 가진 젋은 남성들을 이긴다. 작지만 단단한 연대를 통해 승리한다. 징검다리 게임에서는 유리공이 자신의 재능으로 자신과 더불어 타인을 돕는다. 이러한 과정 중에 결국 사람을 믿고 연대를 강조한 성기훈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늘 애매한 위치에 서서 놀이를 바라보던 성기훈은 나를 지키는 행위가 곧 우리를 지키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결국 게임 포기 선언을 한다. 마지막 적이었던 상우에게 손을 내밀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한다.


이 연대의식은 게임이 끝난 후에도 계속된다. 길거리의 노숙자를 돕는 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는 성기훈. 홀로 남겨진 강새벽의 동생 강철과 또 홀로 남겨진 상우의 엄마를 이어 맺고, 상금을 남기며 떠나는 성기훈. 결국 철저한 개인이었던 참가자들은 전래놀이를 통해 ‘우리’로 모아진다.


작품 속에서 놀이로서의 오징어게임은 1화와 9화에 두 번 등장한다. 1화에서 ‘결승점을 밟으면 만세를 외쳤고 그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었다’는 성기훈의 오징어게임과 9화에서 ‘가장 육체적이고 폭력적이면서 어떤 제한도 없는 게임’으로 정리되는 오징어게임은 그 온도차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온도차를 가로지르는 동일한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암행어사’라고 불리는 행위다. ‘깽깽이로 다녀야 하는 공격자가 기회를 노려 오징어 허리를 가로지르면 두발이 자유’가 되는 게임 규칙이 그것이다. 오징어게임의 장을 가로지르기 위해 다시 게임장으로 향하는 성기훈이 연대의식을 등에 업고 동양의 암행어사로서 서구식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기울어진 깽깽이의 몸으로 진정한 자유를 얻어 ‘만세’를 부를 수 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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