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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Feb 14. 2023

엄마, 기억은 다 흑백이야.



강릉에서 겨울살이 중인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좋아하는 식당에 갔다. 여름에 갔을 때 좋았던 곳이다. 1인 셰프 식당이라 주문을 하고 좀 기다렸다. 아이들은 그 사이 또 우당탕탕 여러 이야기를 했다.



늘 그렇듯 그런 아이들 옆에 별생각 없이 앉아 있는데 초등 아들 둘이 자기들의 유치원 시절을 이야기한다. 두 살 터울이라 일 년은 같이 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는데 그때 블럭방에서 만나서 무얼 했는지 이야기하다 웃고, 옛 친구 이름을 펼쳐 놓다 웃고, 벌레 잡던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펼쳐 놓는다. 그러다 큰아이가 불쑥 나를 부른다.



엄마, 옛날을 생각하면
그 과거의 시간들은 색깔이 없어.


응?


그 장면들이 생각나는데 다 흑백이야.
기억은 왜 다 흑백이야?




아이는 나에게 이 질문을 남기고는 곧바로 동생과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의 질문을 잡고 있던 건 나뿐이었다. 아 그런가? 하고 여러 장면을 일부러 떠올려봤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 장면들이 어떤 색감이나 명확한 구체물로 떠오른다기보다 스케치해 둔 것처럼 어쩌면 현상 전 필름처럼, 그렇게 조금은 뭉개진 형태로 떠올랐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원래 이랬나?



나는 아이의 말을 듣기 전까지 기억의 색깔이랄지 기억의 형태이랄지 뭐 그런 것에 대해서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진짜네. 지나간 시간들은, 진짜 그러네. 색도 없고 명확한 형체도 없고 오히려 잔상에 가깝게, 흐릿하고 뿌옇고 어딘가 조금 뭉개졌네. 기억이, 이랬구나. 새삼스럽지만 그렇지. 기억은 색도 형체도 흩어지며 그렇게 그 순간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다. 여전히 새삼스럽다.



나는 앞으로 아이의 이 질문이 자주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기억의 색깔과 형태를 고민했을 아이의 그 순간들도 함께 생각날 것 같다.



다음이, 궁금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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