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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했지만 공부가 싫어서

by 쉼표





2017년 2월에 박사졸업을 했다. 아이둘을 데리고 박사학위논문을 썼다고 하면 다들 독하다고 했다. 독했나. 글쎄. 내게는 그냥 분명한 목표만 있었다. 졸업. 한 학기 더 미루는 것에 대해 지도교수님이 이야기할 때 나는 되게 결연했다. 한 학기가 지나도 나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버티고 있는 것 뿐이라고, 꼭 이번 학기에 졸업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논문 1심이 끝나고 대성통곡을 하다가 미뤄져도 된다고 위로하는 남편한테도 말했다. 나 졸업할 건데? 무조건 할 거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난 할 거야. 남편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협상없이 버티고 버텨 끝끝내 졸업을 했다. 2017년2월이면 둘째가 17개월쯤이었다. 내가 선택한 결혼과 임신을 이유로, 내가 선택한 내 직업이나 내 길이 흐지부지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매달렸고 그래서 졸업했다. 이 세계는 박사졸업을 해야만 뭐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것은 끝이면서 시작이었으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내던져지는 그런 일이었다.



그렇게 바득바득 졸업을 하고 모교 외에 학교에서도 시간강사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지난 학기 강사법 소동에서 나는 안녕했고 매 학기 주당 18-20시간씩의 강의를 한다. 나는 강의가 즐겁고 학생들에게 효용성 있는 교육을 하는 것이 더 즐겁다. 그러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내가 이 세계에 약간의 환멸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세계가 아무리 현재중심이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당장 먹고 사는 것 외에 인간 세계에 켜켜로 쌓인 그 진실이라거나 사유라거나 그런 것을 누군가는 면밀히 살펴야 마땅하다. 즉 누군가는 글자를 먹고 살고 던지고 매만지며 학문의 영역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당장 효용이 없더라도 누군가는 그 절대적인 역할을 해야 하며 그것은 대개 학문 연구자들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반쯤 걸쳐진 이 애매한 존재. 나는 몇백, 몇십 년 전의 글을 뒤져서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을 정돈하는 것. 그것에 쌓인 이야기들을 분리하고 새로운 것을 끌어내는 것의 효용에 의심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 자기들만 아는 말로 긴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도 거북하다. 그들은 그들대로 두어야 한다고 한다면 오케이, 좋다. 문제는 나는 그들이 될 수 없는 것 같다는 데 있다. 아 이 일을 어쩌나. 나는 이미 박사졸업을 했고 당연하게 연구자여야 하는 사람인 것을.




해가 갈수록 자괴감이 커진다. 사실 이 자괴감은 생각보다 거대한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건드릴지도 모르겠거니와, 건드리는 순간 내 길이 지워지는 것 같아서 이마저도 어렵다. 그래서 일기처럼 지금 지껄이고 있는데... 정말 모르겠다. 교수라는 명명백백한 꿈이 있으면 차라리 그 목적을 향해 가겠는데 그마저도 사실 나는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비겁하게 말하고 있는 내가 우스워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꿈은 꼭 교수가 아니다. 그러니 이 존재의 애매함이 더 커진다. 왜 여기 있니? 교수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 길의 최종 포지션이 거기인데 거길 안가겠다고? 그럼 왜 있지? 시간강사 하려고? 그거 잘릴까봐 연구논문 억지로 편수 맞춰서 쓰나?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을 그런 글을? 나에게 가치란 무엇일까? 아 그것을 묻기 전에



나는 왜.......... 여기까지 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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