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일종의 타협이자 포기였던 그 결심들
강사로 대학교육현장에 있는 나는 학부는 사범대를 졸업했다. 대학 다니는 중에 교직과목을 늘 재미있게 들었는데 인간을 대하는 자세도 그렇고 교사라는 직업군이 짊어진 수많은 역할들도 그렇고 나에겐 흥미로웠다. 학부생활 중에 과외나 학원 강사 일을 아르바이트로 했는데 나는 과외보다 학원이 더 잘 맞았다. 일대일보다는 일대다수로 있을 때 오히려 아이들 하나하나가 잘 보이는 경험도 했다. 일했던 학원에서는 매주 학생 2명에 대한 전화상담을 진행하게 했는데 그 어린 내가, 뭘 안다고 학부모에게 말을 건넸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다. 그런데 또 무작정 웃을 수만은 없는 게 그때 나는 나름대로 교직 과목에서 배운 내용을 현장에 적용하는 재미를 혼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막연히 교사나 교직생활에 대해 짐작하고 학교나 교실이 가진 공간에 대해서도 종종 생각했다. 학부 4학년 교생 때도 그랬다. 대학원을 다니는 중에 입시 논술이나 자소서 특강 수업들을 공교육이나 사교육에서 해왔는데 그때도 내 생각은 비슷했다. 공교육 현장에서는 어쩔 수 없을 그 바운더리. 논술 첨삭을 하며 이따금씩 찾아오던 자괴감. 자소서를 위해 생활기록부를 뒤적거리며 이야기를 찾고 혹은 만들어내는 과정들에서 느낀 갑갑함. 이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에는 언제나 대입이 놓여 있었다.
대학에서 일을 하지만 대학이 꼭 필요한가, 에 대한 질문에는 회의적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대학을 가지 말라고는 못한다. 공부라는 게 꼭 그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경험하면서 얻는 여러 근육들이 분명 있고 그 근육은 삶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하냐 마냐, 좋은 대학을 가냐 마냐, 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공부를 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가진 이로움은 생각보다 많다. 대학이 연구기관이자 교육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더 따져볼 필요가 있지만 어쨌든 지금 수준에서 우리는 학교를, 그 바운더리를 무조건 불필요한 것, 성가신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초등 1학년인 큰 아이와 함께하는 과정에서도 이 질문은 늘 달고 살았다. 공교육의 바운더리 내지는 틀에 다소 예민했던 내게, 그보다 더 예민하고 자유로운 아이를 그 환경으로 넣는 것이 맞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언제나 평균이라는 그 허상을 지키고 살아온 내가 아이에게 좀 더 다른 무언가를 선사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가 갖고 있는 특성을 이해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특성만을 존중할 수는 없는 이중성.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날마다 나의 이중성을 들춰내고 확인받는 일의 반복이었다. 어떤 지향점이 분명하다면 차라리 속편할텐데 라는 생각을 언제나 했다. 나의 지향점이라는 것은 자유이면서 평균이고, 고정된 틀이면서 동시에 그 틀을 해체하는 삶이었다. 그 양극단에서 널을 뛰는 내 마음을 나는 늘 마주해야했고 내 이 불안정한 마음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게 못 견디게 힘들었다. 아마 국가에서 인정하는 중등교육기관이면서 그 안에서 남다른 자유와 배움을 경험한 나의 예고 시절은 그 중간지점이었을 것이다.
아이의 초등 입학을 앞두고 나는, 아이가 어떤 바다에서 어떤 결의 파도를 타는 게 좋을까 치열하게 고민했다. 내 이중성은 늘 걸림돌이 되었다. 아이를 더 자유롭게 하고 싶지만 살아갈 이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지게 할 수는 없는 마음. 자유의 마지노선에 대한 고민들로 오래 앓았다. 대안학교 설명회도 가보고 책도 많이 읽고 10대들이 하는 팟캐스트도 들었다. 거기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안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고민들 끝에 아이는 집 앞 공립 초등학교를 다닌다. 으레 그렇듯 말이다.
대체로 내가 하는 치열한 고민의 답은 남들이 으레 선택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지만 나는 내 고민을 존중한다. 당연하게 선택하는 것과 물음표를 붙이고 답하는 그 과정 끝에 선택하는 것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 1학년 필수 교양 수업에서 정답을 찾는 데 익숙했을 학생들에게 이제 정답은 없고 각자의 답이 있을 뿐이라고 자주 이야기해준다. 다만 그 답이라는 것은 생각의 맥락,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나와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러는 나는 이제 막 문제집을 경험하는 아이의 문제집에 빗금을 긋는다. 그 가운데 이는 자괴감은 생각보다 크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어쩌면 꼭 거치고 가야 할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사 종종 한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자음과 모음, 숫자 쓰는 순서를 지켜서 해달라는 단체 공지를 늘 해왔다. 그 순서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그 공지를 볼 때마다 심드렁했다. 뭣이 중한디? 속으로 많이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단체 공지에 몇 줄을 더 붙여 써주었다.
글자와 숫자를 바른 순서로 쓰기 위해 멈추고 고민하며 집중하는 습관은 나중에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는 문장이었다. 그 문장을 보는데 갑자기 아득해졌다. 인간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보다 작은 경험을 가진 상태가 낫다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은 경험을 반복해가면서 여러 근육을 기를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날부터였다. 지금 내 눈에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아이에겐 어떤 힘을 만들어주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 지금은 문장부호를 정답처럼 찍는 게 싫고 답답해 보이지만 그러한 경험을 거쳐야만 나중에 쉼표 자리에 마침표를, 느낌표 자리에 물음표를 찍을 사고의 힘이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동그라미와 빗금 사이에 아이를 가둘 생각은 없다. 아마 우리 아이들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질서와 공동체, 보편적 교육과 약간의 고루함이 결과적으로 아이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한다. 그 균형은 부모의 몫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파도를 탄다. 언제나 일직선으로 내달릴 수는 없고 자기 몸을 한가운데 놓고 몰아치는 파도에 몸을 맡기거나 맞선다. 그러면서 성장하고 또 실패하며 내적인 근육을 가진다. 아이의 지난 시간들도 아마 그랬을 거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파도를 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