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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Jul 25. 2020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의 본격 글쓰기는 예고 문예창작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전까지 나는  읽고 글쓰기를 즐겼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즐겼다는 표현을 다시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려워하지 않았다, 정도면 될까.


그러다 3 가을 어느 , 당연히   학교나 가야지 하고 있다가 예고 문예창작과를 알게 되었고 엄마 아빠에게  거기 갈래, 하니 그래라, 하셨다. 조금 낯선 그곳에 나를 허락하기까지 힘든 고민과 결단이 있으셨을 테지만 부모님은 언제나 그렇듯 그런 불안을 내게 들키지 않으셨다.


실기시험을 보고 합격한  서울에서 안양까지 통학을 했다. 사실 그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새벽 6시에 스쿨버스를 타면  서울을 헤집고 8 조금 넘어 학교에 도착하는 등굣길. 하굣길에는 스쿨버스가 없어서 좌석버스와 시내버스를 여러  갈아타며 집에 가던 나날들. 당시에는 문예창작과가 설치된 예고가 거기에만 있어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나는 울었다. 단지 학교만 다녀왔는데도  어둑한 시간에 돌아오는  힘들고 지쳐서 힘들다고 엉엉 울었다. 그런  어깨를 매만지며 엄마가   학교로 전학할래? 라고 물었는데, 나는 순간 되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힘든데 근데 엄마,  여기 다니고 싶어. 엉엉엉.


열일곱. 보통 열일곱과 다른 수업을 받는다는 약간의 허세와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기분.  안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는 뿌듯함과  세계 안에서 무언가   있을  같은 자신감. 그런 것에 빠져 정말 열심히 썼다. 나에게 글은 자유  자체였고 글을 쓰고 나면 마음이 맑아졌다. 지금이야 이렇게 명확하게 말할  있지만 그때는  감정이 뭔지도  몰랐다. 처음 겪는 감정들이었고 그냥 빠져들기만 했다. 나는 그때 글을 사랑했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동시에 글을  써서 전국 규모 대회에서 3 이내 상을 여러  아야 하는,  수상실적이 꼭 중요한 상황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 해야 하는 것까지 일치하는 삶은 만족스러웠다. 힘든 일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 나는  조건에서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정말 글에 매달렸고 파고들었으며 날마다 글로 웃고 떠들다 울고 미워했다.  시간들은  인생의 터닝포인트이면서 내가 자라는 토대가 되었다.


물론 대학을 사범대로 가면서 그만큼 열정적인 글쓰기는 못했지만 글을 떼고 살아볼 생각은  했다. 대학원 진학 이유도  단순했다.  인생에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만날  있을까. 그렇다면 끝까지 해보는  맞지 않을까. 그게 내게는 문학이었고 시였으니 나는 어쨌든 글을 붙들고 살고 싶었던  같다.


실제로 나는 미니홈피,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브런치  다양한 채널에 기록들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어느 때는  글이고 어느 때는 짧은 우스갯소리였지만 형태가 어떻든  모든 것은  기록이었다. 나는 남겨야만 남겨지는   시간이고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사진을 열심히 찍는 만큼 순간을 붙들고  쓰기도 했다. 그게  누군가에겐 우스운 일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그렇게 글과 나라는 관계에만 집중하고 살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쓰고 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작가나 학자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을 때는 약간 충격이었다. 뭐지?  잘하네? 심지어 다들  쓰고 싶은 욕구가 넘치잖아?


물론 여기에 쓰기에는 지겨울, 그런 길고 번잡한 사고의 과정을 거친  나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어 하고 글을 읽고 싶어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찾아오는 질문이 있으니 그게 바로 이것이다.


이 기록들은 어디로 향하는가



어디일까, 이 무수히 많은 기록들의 목적지는. 글쓴이의 내면인가, 글쓴이의 삶 그 전체인가, 아니면 타인인가, 구독 수인가, 하트 수인가, 무엇인가?


요즘의 글쓰기 채널들은 특히 더 사적이면서 공적인 특성을 안고 있으니 답이 쉽지 않아 보인다. 내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독자를 상정하는 글쓰기들. 대놓고 삶을 전시하는 인스타그램도 아닌 브런치에서도 간혹 맞구독이나 맞좋아요를 바라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이 시대의 글쓰기라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여러 곁가지들을 끌고 갈 어떤 매개체가 된다는 거겠지.


이쯤 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글을 쓰는데, 나까지 보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드는 게 사실이다. 내가 쓰고 있는 글들은 세상의 소음이지는 않을까, 내가 남기는 기록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말을 줄이고 글을 줄이는 게 미덕인가, 하는 생각들 말이다.


이 생각을 물고 가다 보면 나는 논문 쓰던 때로 또 가닿는다. 내가 석사논문을 쓸 때, 내 논문 따위가 학계에 이로울 수는 없으니 나에게라도 이롭게 하자 생각하고 주제를 엎은 경험이 있다. 그 뒤로는 신 나게 썼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나에게 재미있으니 그거면 되었다. 박사논문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포화상태인 국문학 연구판에서 내가 뭐 얼마나 학문과 세상을 이롭게 하겠나, 물으며 내 안으로부터 주제를 묻고 찾아 썼다.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면 나라도, 나에게라도 이로운 글쓰기를 늘 선택했던 것 같다.


아마 저 질문에 대한 답도 그렇겠지. 내 글쓰기, 내 기록의 방향은 결국은 나다. 나로 시작해 나에게 돌아와 나를 돌보는 글쓰기. 나를 이롭게 하는 글쓰기. 내 글은 나를 향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나를 돌보기 위해, 나로 향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나를 들여다보고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내 감정과 마음을 만나기 위해 글을 쓴다. 붉어진 스스로와 화해하고 웅크린 나를 응원하기 위해 글을 쓴다. 꼭꼭 숨은 나를 들춰 반성하고 멀리 달려 나간 나를 제자리에 앉히기 위해 글을 쓴다. 이 수많은 글자들을 넘나들며 내가 나를 좀 더 가까이에서 만나기 위해 글을 쓴다. 내가 나를 돌보는 방법. 그러면서 나를 잃지 않고 지키는 방법. 그것은 돌고 돌아 결국 글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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