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의 본격 글쓰기는 예고 문예창작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전까지 나는 책 읽고 글쓰기를 즐겼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즐겼다는 표현을 다시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려워하지 않았다, 정도면 될까.
그러다 중3 가을 어느 날, 당연히 집 앞 학교나 가야지 하고 있다가 예고 문예창작과를 알게 되었고 엄마 아빠에게 나 거기 갈래, 하니 그래라, 하셨다. 조금 낯선 그곳에 나를 허락하기까지 힘든 고민과 결단이 있으셨을 테지만 부모님은 언제나 그렇듯 그런 불안을 내게 들키지 않으셨다.
실기시험을 보고 합격한 후 서울에서 안양까지 통학을 했다. 사실 그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새벽 6시에 스쿨버스를 타면 온 서울을 헤집고 8시 조금 넘어 학교에 도착하는 등굣길. 하굣길에는 스쿨버스가 없어서 좌석버스와 시내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집에 가던 나날들. 당시에는 문예창작과가 설치된 예고가 거기에만 있어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렇게 첫 일주일을 보내고 나는 울었다. 단지 학교만 다녀왔는데도 늘 어둑한 시간에 돌아오는 게 힘들고 지쳐서 힘들다고 엉엉 울었다. 그런 내 어깨를 매만지며 엄마가 집 앞 학교로 전학할래? 라고 물었는데, 나는 순간 되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힘든데 근데 엄마, 나 여기 다니고 싶어. 엉엉엉.
열일곱. 보통 열일곱과 다른 수업을 받는다는 약간의 허세와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기분. 그 안에 내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는 뿌듯함과 그 세계 안에서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그런 것에 빠져 정말 열심히 썼다. 나에게 글은 자유 그 자체였고 글을 쓰고 나면 마음이 맑아졌다. 지금이야 이렇게 명확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 감정이 뭔지도 잘 몰랐다. 처음 겪는 감정들이었고 그냥 빠져들기만 했다. 나는 그때 글을 사랑했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동시에 글을 잘 써서 전국 규모 대회에서 3등 이내 상을 여러 개 받아야 하는, 그 수상실적이 꼭 중요한 상황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해야 하는 것까지 일치하는 삶은 만족스러웠다. 힘든 일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 나는 그 조건에서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정말 글에 매달렸고 파고들었으며 날마다 글로 웃고 떠들다 울고 미워했다. 그 시간들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이면서 내가 자라는 토대가 되었다.
물론 대학을 사범대로 가면서 그만큼 열정적인 글쓰기는 못했지만 글을 떼고 살아볼 생각은 안 했다. 대학원 진학 이유도 단순했다. 내 인생에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끝까지 해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게 내게는 문학이었고 시였으니 나는 어쨌든 글을 붙들고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나는 미니홈피,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브런치 등 다양한 채널에 기록들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어느 때는 긴 글이고 어느 때는 짧은 우스갯소리였지만 형태가 어떻든 그 모든 것은 내 기록이었다. 나는 남겨야만 남겨지는 게 내 시간이고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사진을 열심히 찍는 만큼 순간을 붙들고 잘 쓰기도 했다. 그게 또 누군가에겐 우스운 일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그렇게 글과 나라는 관계에만 집중하고 살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잘 쓰고 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작가나 학자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글을 참 잘 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을 때는 약간 충격이었다. 뭐지? 다 잘하네? 심지어 다들 글 쓰고 싶은 욕구가 넘치잖아?
물론 여기에 쓰기에는 지겨울, 그런 길고 번잡한 사고의 과정을 거친 뒤 나는 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어 하고 글을 읽고 싶어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이야기를 나누는지 잘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찾아오는 질문이 있으니 그게 바로 이것이다.
이 기록들은 어디로 향하는가
어디일까, 이 무수히 많은 기록들의 목적지는. 글쓴이의 내면인가, 글쓴이의 삶 그 전체인가, 아니면 타인인가, 구독 수인가, 하트 수인가, 무엇인가?
요즘의 글쓰기 채널들은 특히 더 사적이면서 공적인 특성을 안고 있으니 답이 쉽지 않아 보인다. 내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독자를 상정하는 글쓰기들. 대놓고 삶을 전시하는 인스타그램도 아닌 브런치에서도 간혹 맞구독이나 맞좋아요를 바라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이 시대의 글쓰기라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여러 곁가지들을 끌고 갈 어떤 매개체가 된다는 거겠지.
이쯤 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글을 쓰는데, 나까지 보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드는 게 사실이다. 내가 쓰고 있는 글들은 세상의 소음이지는 않을까, 내가 남기는 기록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말을 줄이고 글을 줄이는 게 미덕인가, 하는 생각들 말이다.
이 생각을 물고 가다 보면 나는 논문 쓰던 때로 또 가닿는다. 내가 석사논문을 쓸 때, 내 논문 따위가 학계에 이로울 수는 없으니 나에게라도 이롭게 하자 생각하고 주제를 엎은 경험이 있다. 그 뒤로는 신 나게 썼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나에게 재미있으니 그거면 되었다. 박사논문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포화상태인 국문학 연구판에서 내가 뭐 얼마나 학문과 세상을 이롭게 하겠나, 물으며 내 안으로부터 주제를 묻고 찾아 썼다.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면 나라도, 나에게라도 이로운 글쓰기를 늘 선택했던 것 같다.
아마 저 질문에 대한 답도 그렇겠지. 내 글쓰기, 내 기록의 방향은 결국은 나다. 나로 시작해 나에게 돌아와 나를 돌보는 글쓰기. 나를 이롭게 하는 글쓰기. 내 글은 나를 향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나를 돌보기 위해, 나로 향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나를 들여다보고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내 감정과 마음을 만나기 위해 글을 쓴다. 붉어진 스스로와 화해하고 웅크린 나를 응원하기 위해 글을 쓴다. 꼭꼭 숨은 나를 들춰 반성하고 멀리 달려 나간 나를 제자리에 앉히기 위해 글을 쓴다. 이 수많은 글자들을 넘나들며 내가 나를 좀 더 가까이에서 만나기 위해 글을 쓴다. 내가 나를 돌보는 방법. 그러면서 나를 잃지 않고 지키는 방법. 그것은 돌고 돌아 결국 글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