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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Apr 09. 2020

아들과 나누는 평등이야기(1)

무게 중심 옮기기





올해 8살이 된 아들은 어렸을 때 핑크색 이불을 애착 이불로 썼다. 물고 빨고 쉬야 묻으면 빨래하고 말리고 몇 년을 쓰다가 4살의 어느 날 이별식을 했다. 그때만 해도 기질적으로 초예민할 때라 이별식을 일주일에 걸쳐서 했다. 핑크색 이불(이불 색깔이면서 이불의 애칭)도 엄마 만나러 가야 된다고 날마다 이야기를 했고 아이는 일주일 간 그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며칠 뒤 새 이불 친구를 만나러 가자는 내 제안에 선뜻 따라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불 하나에 일주일 이별식이라니, 싶지만 그때 아이에겐 그게 세계의 일부였으니 무작정 가볍게 여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불을 사러 가서 아들은 또 다른 핑크색 이불을 골랐다.



당시 나는 아이를 낳아 키우며 엄마인 여성에게 주어지는 그 수많은 무게와 부담감에 늘 불만을 토로했었다. 애는 같이 낳았는데 왜 너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삶을 그대로 살고 나는 이렇게 집에 주저앉아 있어야 하느냐고 매번 되묻던 나였다. 너는 왜 그대로 출근하고 나는 왜 후줄근한 옷을 입고 널 배웅해야 되냐고 매일 화를 내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성차나 어떤 고정관념들에 그토록 치를 떨던 내가, 핑크색 이불을 고르는 아들을 바라보며 별 망설임 없이 그것보다는 하늘색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매우 자연스럽게 했다. 충격이었다. 그 생각에는 어떤 머뭇거림도 없었다. 응당 그래야하는 것처럼 나는 자동차가 그려진 하늘색 이불을 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때였다. 혼자 충격에 빠져 자문하는 사이, 옆에 점원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에이! 남자아이인데  파란색 해야지!"



오, 안 돼. 일순간 내게는 어떤 책임감이 파도치듯 몰려왔다. 내 아들의 취향을 내가 지켜야겠다는 사뭇 진지한 어떤 마음들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나는 재빨리 태도를 바꾸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네가 하고 싶은 걸로 고르면 돼.



그렇게 내가 내 헐벗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이, 아들은 핑크색 이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아이가 끝까지 핑크색 이불을 고집해줘서 오히려 고마웠다. 내 잘못을 아이에게 떠넘기지 않고 나로부터 지켜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지금도 핑크색 이불을 챙기며 산다. 그리고 나는 아들을 키우는 어른, 여자,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들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을지 더 꼼꼼히 자기 점검을 하기 시작했다. 핑크색 이불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고 하면 될까?




실제로 아이가 커갈수록 허물어야 할 고정관념들은 더 많이 보였다. 아이가 겪는 세상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허물어야 하는 것들의 종류들도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가령 몇 년째 숏컷으로 살고 있는 내 머리스타일에 대한 유치원 친구들의 질문이나 엘사 캐릭터 용품을 모으는 큰아들의 취향, 청각장애를 가진 고모/고모부에 관한 생각들, 어린이집에서 만난 다문화가족 친구 등 아이가 만나는 세상 곳곳은 사실 통째로 허물어져야 하는 대상 그 자체였다.




이제 나는 시간 날 때마다 그 이야기들을 소재별로 풀어서 써보려고 한다. 숏컷 엄마를 바라보는 미취학 아동들의 시선과 엘사를 좋아하는 남아를 놀리는 말들과 무덤덤하지만 힘 있는 대응의 말들, 여러 조건의 소수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다뤄질 수 있을 것 같다.




슬프게도 우리는 아직 남자에게 앞번호를, 여자에게 뒷번호를 주는 시대에 산다. 주민번호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초등학교에서도 여전히 남자부터 앞번호를 받는 게 지금, 여기, 이 시대다. 나는 우리 아이가 3번인 게 슬프다. 3번이어서 좋은 게 아니라 8살부터 그런 순서에 자연스럽게 놓이는 것이 참 슬프다. (*학교에 따라 남녀 상관없이 이름순으로 번호를 부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슬픔을 모아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평등주의자로 이 세계의 다양한 무게중심에 대해 생각하고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또 또 또 이야기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그 기록으로 우리가 이미 해왔고 또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볼 생각이다. 모든 것은 글로 남겨야만 기억과 기록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핑크색 이불이 쏘아 올린 작은 공





co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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