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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태아의 갈등

2013년 만삭의 기록

by 쉼표





2013년 첫째 만삭 때의 일기. 오래 전 적어둔 내 마음을 다시 꺼내 읽었다. 글자들을 따라 내 마음들이 다시 살아난다. 글이란, 기록이란 이런 거지. 다 잊은 줄 알았던 그 날의 감정들을 그대로 느끼는 것. 그 결들을 다시 따라가며 나를 만나는 것. 다시 코끝이 찡해지는 것.





2013. 4. 23.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힘들어할 때마다 몸에 사람 하나가 들어 있는데 당연한 거지, 라는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그 위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도 아는 거니까. 앎으로 나아지는 게 아니니까.


내가 느끼는 힘들고 우울한 감정을 직시하고 그것이 다 소모될 때까지 분출하는 것도 죄스럽다. 엄마가 느끼는 걸 아기가 고스란히 느낀다는 말이 온몸이 으스러질 만큼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학부 철학 부전공, 철저한 페미니스트 강사의 생명윤리학 수업에서 읽은 엄마-태아 갈등이라는 챕터가 나는 꽤 충격적이고 동시에 우스웠다. 엄마면 당연히 견뎌야지 아기랑 싸울 텐가 싶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나는 지금 엄마가 태아와 갈등을 겪는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임신기간 중에 겪는 감정의 문제로부터 엄마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태아를 중심에 두며 자연스레 주변으로 밀리는 엄마의 몸, 감정들. 더 아끼고 보살펴야함에도 불구하고 강요받고 강제당하는 수많은 굴레들.


막달에 접어들며 하루가 다르게 힘들어지는 몸 때문에 정신까지 피폐해지려는 요즘, 힘내라는 말보다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바라보고 느껴도 된다는 토닥임이 더 절실했다. 부모님이 가만히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면, 신랑이 눈물을 쏟는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면, 함께 자연출산을 준비하던 한 언니의 그 토닥임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도 피폐한 정신으로 버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출산은 시작일 뿐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면서 아직은 내 코앞에 놓인 이 문제를 잘 끝내는 것 외엔 소원이 없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 삶.
그 과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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