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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며 드러나는 나의 민낯

by 쉼표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를 키우며 내가 얼마나 감정적인가를 확인한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몰랐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감정적이다. 아이. 내 아이. 나로부터 자라는 내 아이는 나로부터 어떤 것을 받을까. 내가 우리 부모에게 받은 안정적인 사랑을 아이는 느낄까. 아니라면 언제쯤 느낄까.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한 사람을 길러낸다는 것은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불완전한 사람이 그 불완전함을 매일 마주하고 전하며 또 다른 불완전을 키우는 이 일을 왜 우리는 아무에게나 권하고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쉽게 말하는 걸까. 왜. 대체 왜.




아이를 키우며 매일 확인하는 민낯에 때로는 고꾸라질 것 같이 지친다. 나의 바닥을 내 아이로부터 확인하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깝다. 완전한 타인이 아닌 내 아이로부터 나의 바닥을 확인해야 한다니. 나의 바닥을 아이에게 날마다 들켜야 한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나를 가장 사랑한다. 엄마를 수천 번 부르고 눈을 마주치면 웃고 안기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의 민낯에도 늘 그렇게 응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더 나락으로 떨어진다.




나의 바닥을 보라고, 나를 직면하라고, 신이 나에게 그런 이유로 자식을 보내신 거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벌 같다. 아이가 주는 행복만큼 딱 그만큼 고통스럽고 그만큼 슬프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 나는 그럴 깜냥이 없다는 걸 매일 느끼면서도 저버릴 수 없는 이 막중한 책임감. 내 눈치를 보며 색종이를 오리고 숙제를 하는 아들을 다시 돌봐야 하는 이 굴레. 정말 버겁다.




이러다가 나는 또 감정을 추스르고 아이를 보고 웃고 매만지며 아이로부터 행복을 느끼겠지. 내 인생은 너가 있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고백하겠지. 그런 내 모습이 소름 끼치게 싫다. 그 양극단의 감정 역시 실오라기 하나 못 걸친 민낯이니까. 모든 감정의 민낯을 아이로부터 확인하는 삶이 못마땅하다. 나는 늘 더디고 늘 지는데, 이런 나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매일 자라고 있다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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