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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나니 보이는, 나의 몫

by 쉼표




당장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참 복잡다단해서 해야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다시 집어삼켜야 하는 말도 참 많다. 오래된 텍스트보다, 겹겹이 쌓인 사유보다 당장 눈앞의 세계가 더 나를 조른다. 면밀히 말하자면 당장 눈앞의 세계가 결국 그 오래된 텍스트의 연장이며, 겹겹이 쌓인 사유의 실재이지만 그렇지만 모두가 그 모든 것을 잇대며 사고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 바쁘고 급박하고 위태롭고 슬프다.



한동안 스스로를 괴롭힌 나는 아마 이 지점에서 늘 헤맸던 것 같다. 우주 같은 텍스트와 사유 속을 뒤적거리다 눈앞에 실재하는 무언가를 놓쳐버리면 허망할 것 같았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헤아림들이 내게는 그리 쓸모 있는 일이 아니었고 어떨 때는 등 돌리고 앉은 선비 같았다. 그 절개는 어떨 때는 숭고하지만 어떨 때는 비겁했다. 가끔 그 헤아림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이롭게 할 것인가 따져 물었다. 더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학문을 위한 학문의 반복이 역겨웠다. 붙들고 앉아 써대는 그 글이, 그들만 알아듣는 그 글이, 대체 어디에서 쓸모가 있는지 서글펐다. 그래서 이 일은 이 일에 대해 질문이 없는 사람만 해야 한다. 나처럼 자꾸 질문을 하면 길을 잃는다.



늦은 밤 산책을 하며 쓸데없이 나를 갉아먹는 이 생각들에 지쳐 엉엉 울었다. 되돌리기도 더 나아가기도 애매한 어느 곳. 내 말을 한참 듣던 남편이 말해주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아이들이 있다는 것. 마구 자라나는 아이들이 나의 어느 면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되기에는,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삶이 너무 복잡해졌다는 것. 그런가, 그런가...



조금 맑아졌다. 내게는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의 아이들이 있다. 우주 속을 뒤적거려야 하는 그런 것 말고 명명백백하게 내 앞에 놓인 생동하는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매일 오늘을 산다. 그 오늘은 어른들의 헤아림을 완전히 벗어난다. 지난 1월의 어른들이 오늘의 7월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으레 어른들은 2020년의 7월 3일을 그렇고 그런, 여름 한가운데 놓인 뜨거운 어느 날, 혹은 장마에 눅눅할 그런 날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오래된 텍스트는, 겹겹이 쌓인 사유는, 역사는, 어른은, 그런 날만을 견준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열 손가락으로 여름을 다 세기도 전에 여름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2013년생과 2015년생에게 올여름은 수영장에서 노는 뜨거운 날에서 마스크를 벗고 인중에 땀을 닦아내는 그런 날로 옮겨갔다. 아이들의 여름은 우리의 예상과 달랐고 아이들의 매일은 여전히 지겹고 숭고하고 비겁하면서 쓸모없는 어른들의 사유로부터 더 멀어진다.



꼭 그 오래된 역사와 텍스트와 사고를 잇대어 가야만 한다면,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다. 당장 오늘을 해석하고 위로하고 내일을 지향하는 어떤 말들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다소 빠르고 거칠게 소비되고 또 버려지더라도 오늘의 말로써 하는 것이 맞다. 그런 말들은 세상을 향하면서 내 아이들을 향한다. 옛날 그 어디에 서서 고고하게 선 포즈보다 몸을 힘껏 숙이고 아이들이 사는 오늘을, 순간을, 이 낯섦을, 두려움을 위안하고 위로하고 나누는 게 맞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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