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큰아들이 5개월이던 시절의 일기
싱어가 말하는 생명윤리학에서의 엄마는 태아와 갈등을 겪기도 한다. 철저히 페미니즘에 입각한 입장이라 쉽사리 동의하지 못했지만 내가 임신 중일 때 갈등 비슷한 걸 겪어보니 충분히 가능한 발언이다. 갈등이라기보다 오로지 "아기"에 초점이 맞춰진 열 달간 내 감정은 늘 기쁨과 즐거움의 영역에 머무르기를 강요당했다. 울지도 못했고 짜증내지도 못했다. 아니 사실 하긴 다 했지만 울거나 짜증내다가 죄책감을 느껴야했다. 왜? 엄마니까. 아기가 그대로 받아가니까.
아기를 낳고 첫 한 달간은 참 힘들었다. 출산이 주는 심신의 우울함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성은 여자라면 당연히 생기는 그런 본능이 아니란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걸까 많이 생각했다. 누가 봐도, 그리고 누구보다 모성이 폭발할 것 같은 나는 실제로 그렇지 않았고 덩그러니 놓인 아기를 사랑해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남들은 이런 아기들이 바로 예뻐 죽겠다는 거지? 하며 말이다. 아기에게만 집중할 수 없었던 내 상황이 분명 이유가 되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엄마와 태아가 갈등을 겪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고작 오 개월 남짓 아기를 키웠다. 모성이란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모성이란 갓 세상에 나와 겁에 질린 아기가 비로소 입으로 세상을 오물거리다가 점점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며 공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 앞이 아닌 위와 아래, 옆과 뒤를 살피며 "나의 공간, 세상"에 적응하는 것과 같은 패턴으로 형성된다. 시간이 걸리고 충분한 탐색과 사유의 시간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마음의 발달이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 모성이란 그렇다.
한 시간 넘게 품에서 낮 잠투정을 부리는 아기를 바라보다 일순 약간의 짜증이 밀려왔다. 이런 상황을 사랑과 인내와 웃음으로 이겨내지 못하는 내가 미웠지만 이럴 수 있는 거라고 스스로 변명했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파닥거릴 필요는 없다. 물론 인류 역사에서 '어머니'의 위치는 건드릴 수 없이 공고하지만 그런 '어머니' 옆에는 또 다른 방식의 매력적이고 위대한 어머니들이 숱하게 놓여 있지 않은가.
나도 그 옆에 서면 된다.
내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를 보살피고 사랑하며 그보다 나를 더 사랑함을 잊지 않으며...
그렇게 말이다.
이런 기나긴 이야기 속 뻔한 깨달음이라니. 웃기다.
그래도 이것은 온전히 날 위한 것이니 꼭 기억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