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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Dec 24. 2020

전자책을 처음 읽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그것으로 먹고사는 내게 책은 무조건 종이책이라는, 다소 보수적인 공식이 있었다. 실제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자책을 본 역사가 없다. 종이책 역시 빌려서 본 적도 없다. 책은 사서 읽는 것, 검지에 다음 장을 얹고 넘길 준비를 하는 것, 밑줄을 긋는 것, 내 마음껏 충분히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며칠 전 밤부터 그 생각들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 그 밤은 어두운 방에서 모바일로 조각난 글을 읽던 흔한 밤이었다. 그런데 그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게 낫겠어.


하지만 책을 읽으려면 불빛이 필요하고 책을 기대어 세워 둘 벽이 필요하고 손가락이 필요했다. 누워서 무언가를 읽는 자세는 언제나 불편했다. 결국 그 시간, 내게 종이책은 적당하지 않았다.


그러다 광고에서 본 이북 앱이 떠올라 깔았다. 한달 무료 체험을 눌렀다. 읽어야 했고 그래서 읽었지만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 책을 골랐다. 그리고 읽었다. 즐거웠다. 무엇보다 편안했다. 동시에 내가 얼마나 모바일 환경에 익숙한 사람인지 다시 깨달았다.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 화면을 넘겼다. 내 눈이 편안한 배경색을 고르고 글자크기를 조정하고 좋아하는 서체를 선택했다. 더 편안해졌다. 하이라이트를 치며 좋은 문장들을 모았다. 한 데 모아진 문장들을 다시 돌려 읽으니 어쩐지 지루한 날들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새로운 힘이 생긴 것 같아서 반가웠다. 며칠째 이어지는 시간들. 하지만 결국엔 돌고 돌아 여기라는 게 우습고 조금은 슬프다. 나의 시작은 어디였더라. 그 시작은 가끔 늪같다.


십 대의 여러 날들을 글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았다. 여전히 나는 글을 곁에 두고 살지만 모양은 조금 달라졌다. 문득 글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나로부터 멀어져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하게 다지는 사람들을 보면 어딘가 서늘해진다.



전자책을 읽으며 돌고 돌아 다시 나를 만나는 시간이라니.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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