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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Apr 12. 2021

좀비를 좀비라고 부르지 못해

아이의 일기장을 보다가 발견한 거짓 혹은 진실



작년,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가 학교에 간 날은 손에 꼽힌다. 올해 2학년이 된 아들. 돌봄과 학습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저학년은 매일 등교를 하고 있고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매일 등교 덕분에 아이는 작년에 못다 한 학교 경험을 몰아서 한다. 그중 하나가 일기 쓰기.


작년부터 집에서 그림일기를 종종 쓰기는 했지만 아이에게 스스로 하루를 정리하게 하고 자기 마음을 글로 표현해보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내가 제시한 것이었고 학교에서 따로 검사를 하는 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올해는 담임선생님이 일기며 독서기록장이며 일주일에 몇 편 이상을 쓰도록 하고 주 단위로 걷어 검사를 한다. 아이는 글을 쓰며 여러 감정 표현을 활용하고 있는데 그 부분에 별표나 밑줄을 그어주는 정도다.


어제 자기 전에 일기를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에게 일기를 권했고 아이는 할아버지네 마당에서 아빠와 사촌 형아와 동생과 함께한 '좀비놀이'에 대해서 쓰겠다고 했다. 잘 알다시피 한 사람의 눈을 가리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잡는 놀이다. 마당이 넓으니 호스로 대강 구역을 잡고 그 안에서 놀이를 했다. 모두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즐겁게 말이다. 아이는 그 재미난 이야기를 일기장에 옮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가 쓴 일기를 보는데 그 어디에도 '좀비놀이'라는 말은 없었다. 대신, 오늘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말인 '술래잡기'라는 말이 일기장 여기저기 쓰여 있었다. 아 녀석이, 선생님의 생각이 걱정되어 놀이 이름을 슬며시 바꿨구나 싶어 처음에는 웃음이 났다. 물론 아이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재미있었다'는 부분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쓰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해줬다. 아이는 두세 줄 더 붙여서 썼는데 거기에는 '좀비'라는 말 대신 '우리가 좋아하는 캐릭터로' 놀이를 해서 더 재미있었다고 쓰여 있었다. '좀비'를 '좀비'라고 부르지 못하는 아들. 왜 그냥 말을 못 하고 그리 에둘러서 쓰는 거야, 또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아이에게 '좀비'를 쓰라고 할 이유도, 쓰지 말라고 할 이유도 딱히 없다. 사실 이 시절 일기는 아이가 자기 하루를 스스로 되돌아보고 스스로의 마음을 표현하게 도와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을 규칙적으로, 습관처럼 만들어주기 위해 학교에서는 사적인 글을 검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이제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나의 일기가 내 하루를 쓰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엄마나 선생님 같은 독자가 상정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학교 생활에서, 특히 조금 깐깐한 담임선생님에게서 '좀비'라는 캐릭터가 어떤 의미일지도 알게 된 것이고 그런 놀이를 했다는 것을 솔직히 쓰기 꺼려지는 그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글쎄. 무엇이 맞을까. 고작 9살 일기장에서 시작된 자기 검열. 물론 아이에게 자기 검열이라는 네 글자가 너무 과잉된 글자일 수는 있지만 사실 이 일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그런 것이다. 아이는 '좀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질 의식적이면서 무의식적인 어떤 사고로부터 미리 도피한 것은 아닐까. 그럼 아이가 '좀비놀이' 대신 '술래잡기' 혹은 '우리가 좋아하는 캐릭터'라는 말을 택한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화의 과정인가. 아니면 슬픈 성장인가. 혹은 그냥 이렇게 글로 쓸 거리도 못 되는 그저 그런 일상일까. 무엇일까.



아직 9살인 아이의 뒷걸음질이 유쾌하지 않다. 나 역시 아이에게 엄격한 편인데 세상도 함께 엄격하구나. 아니지. 세상은 원래 엄격한 곳이니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겠지. 아이와 함께한다는 것은 그래서 너무 어렵다. 자꾸 모든 탓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움츠러든다. 내가 더 먼저 도망가고 싶다. 아들의 일기장에서 나는 좀비를 영영 만날 수 없는 걸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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