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미술 선생님

신영헌 화백

by 혼자놀기

약속이 있어서 광화문에 가야 하는데 마침 약속 장소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보인다. 무료는 아니어도 갈아타지 않아도 되니 좋다. 더구나 강남구 사는 노인들은 버스 탑승료도 세 달마다 한 번씩 지원해 준다. 달마다 2만 원씩 주니까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면 차비는 거의 들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강남역을 지나는데 가로수로 심긴 이팝나무가 활짝 피어 향기를 내뿜고 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는데 좀 차갑기도 하지만 버스 창문을 조금 여니 훨씬 기분이 산뜻해진다. 차가 한강을 건너고 남산을 넘어간다. 길 왼쪽 아래로 이태원, 해방촌이 있다. 한강이 흐르는 것은 잘 보이지 않고, 강남은 뿌연 먼지 속에 낮게 보인다. 기사가 달리던 버스를 갑자기 길 옆에 세우더니 뭔가 점검한다. 뭐가 문제가 생겨서 다음 버스를 타란다. 12분 후에 온다던 버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왔다. 다행히 약속 시간에 1-2분만 늦으면 되겠다.


프레스센터에서 만남과 식사를 해결하고 나오니 길 건너편 덕수궁에서 전시회를 한다.


론뮤익전시를 보러 멀리까지 갈까 하다가, 길 건너 전시를 보기로 작정했다. 초현실주의와 한국현대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내가 도자기 작품을 가지고 있는 정규의 그림도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린 시절 나에게 그림을 알게 해 준 작가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느닷없이 이 분 생각이 떠올라 찾아봤더니 크게 활동하지 않는 종교미술가로 소개되어 있었다. 내 어린 시절 삼선교에는 신영헌미술연구소라는 제법 큰 미술 학원이 있었다. 이 학원의 원장이 신영헌화백이었다. 당시 몇 차례의 국전에서 특선을 한 작가여서 학생이 제법 많았다. 학생들의 공간이 있고, 가리개로 칸을 나눈 작업실이 있었는데 국전서 특선을 한 파란색 커다란 그림이 어린 나의 마음을 끌어 자주 작업실에 들어가 바라보곤 한 기억이 있다. 그 작품은 이번 전시에 나오지 않았다. 서늘한 느낌과 신비한 느낌이 나던 작품으로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이 화실에서 그림을 배워 미대를 간 동네 형들이 있고, 도자기 공예로 대학 교수가 된 형도 있다. 내 마음대로 그리고 보여드리면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해줘서 난 늘 그림을 잘 그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미술 선생님은 그림 하나하나를 자기 방식으로 그리지 않으면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그림에 흥미를 잃었었다. 나중에 모대학 미대교수 하시는 선생님을 뵌 적이 있는데, 그때 왜 그랬는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가 좋아했던 작품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린 날 나를 늘 칭찬해 주시던 스승의 그림을 다시 봐서 행복한 하루였다.

덕수궁 연못 앞의 모란이 한창이다. 올해는 게으름 피우다 모란 피는 것을 못 보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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