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겨울이 다가오면서 새해 인사를 위해 카드를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냐 하면, 2026년 병오년은 말띠 해다. 내가 태어나서 여섯 번째 돌아오는 말띠해인데, 손자도 말띠해에 태어나서 나와 60년 차이다. 말띠가 말띠해에 말 그려서 새해 인사를 한다? 뭐 이런저런 의미로 말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만들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엽서 크기의 수채화 용지를 사서 열심히 그리다 보니 제법 많은 양이 되었다. 수채화도 있고, 오일 파스텔도 있고, 그냥 가는 펜으로 그리고 색연필로 칠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이 인쇄된 명함 말고 내가 그림을 그린 명함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어느 날 덕수궁에서 하는 전시회를 가보니 이인성화백이 젊은 날 명함만한 종이 위에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더 의욕이 생겼다. 그래서 온갖 말을 크게도 작게도 그려서 수석회 문집 보낼 때 끼워 넣어 새해 인사도 써서 보냈다. 책갈피로 라도 쓰시라는 의미로 보냈다.
그렇게 보내다 보니 그림이 눈에 띄게 빨리 줄어들고,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보내도 한 번 보고는 휙 버릴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림 보내기를 중단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판화를 배워서 카드를 만들어 수고를 좀 덜어볼까 하는 얍삽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림 그리기를 열심히 하다 보니 이번에는 얼굴 그리기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가 생각해 봐도 나는 참 해보고 싶은 것이 무한정 많은 못 말리는 인간이다.
판화는 가서 배워야 하니 미뤄두고, 연습장에 사람 얼굴을 그려본다. 이거 생각보다 꽤 힘들다. 우선 요령이 필요한데 무작정 달려들다니 무모했다. 인터넷을 뒤져 얼굴 그리기 강좌를 보고 연습해 봤다. 그리고 지인들의 얼굴 사진을 보고 그려봤다. 사진과 그림 속의 사람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대개의 강좌는 연필이나 목탄으로 그려서 농담을 세심하게 표현하는데, 나는 마이크로 펜만 가지고 하려니 안된다. 그래도 얼굴 균형 잡기를 위해 계속 그려댔다. 다 마음에 안 든다.
이번에는 아이 패드에 그려보자는 생각을 했다. 아이패드에 종이 느낌이 나는 패드를 사서 붙이고 아이펜으로 살살 윤곽을 그리고 레이어를 만들어 음영도 넣어보고, 칼라도 넣어봤다. 기대에 못 미치지만 더 많은 연습을 하면 될 것 같다.
계속 그려보니 얼굴 모양이 나오는데 농담 표현 없이 하다 보니 우울해 보인다. 그런데 우울한 이유가 그것이 아니고, 눈과 입의 표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실제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얼굴을 열심히 관찰한다. 너무 열심히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면 좀 민망하기도 하다. 이렇게 찬찬히 챙겨보니 잘 생긴 사람도 엄청 많지만 이상하게 생긴 사람도 많다. 좌우가 심하게 비대칭인 사람도 있고, 양눈이 짝짝이인 것은 아주 일반적이다. 얼굴에 점이 있는 사람도 참 많다. 그동안 남의 얼굴은 참 무심히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사람들 얼굴은 깨끗하고 건강하고 즐거워 보이기는 하지만 마이크로 펜만 가지고 그리기에는 너무 평범하다. 나이 든 사람들의 주름진 얼굴이 더 그리기 좋다. 그리고 그들의 지난 삶이 느껴져서 그것을 표현해보고 싶은 건방진 생각도 들었다. 그림 얼마나 그렸다고 대상의 인생까지 표현해 보겠다는 도 넘는 의욕까지 보이다니 철없고 자기 한계를 모르는 노인이 아닌가?
그래, 내 주제를 알고 차분히 발전해 나가야지.
하루는 바람 부는 추운 날 인사동엘 나갔다가 쌈지길에서 캐리커쳐 그려주는 사람을 만났다. 재미있게 보여서 한참 동안 구경을 했는데, 가만 보니 화가에 따라 차이가 큰데 가격은 같다. 별로 닮게 그리지도 특징을 탁 잡아내지도 못했는데도 별 군소리 없이 돈 내고 가져간다. 속에서 스멀스멀 저거 배워서 식구들, 손자 손녀들, 지인들 그려주면 기념도 되고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학원을 찾아볼까 하다가 우선 유튜브로 가봤더니 강좌가 많이 있다. 체계적인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될 것 같다. 결국은 관찰력 유머가 관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덥석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었다. 이게 익숙해지면 아이패드로 그려서 그 즉시 메일로 날려주면 재미있겠다. 자 올해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얼굴 그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