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_시대를 잇는 질문
06_시대를 잇는 질문
질문으로 시작되는 현재
과거의 질문이 오늘의 길을 비추었다면, 이제 우리는 현재의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인간의 문명사 전체를 흔드는 거대한 변화의 파도 속에 있다. 기후위기, 불평등, 생태의 붕괴, 지역소멸 등 이 문제들은 더 이상 ‘환경문제’라는 좁은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그것은 문명의 질문이며,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우리는 어디서 길을 잘못 들었는가?”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가?”
“다른 방식의 문명은 가능한가?”
이 질문은 단지 학자나 활동가의 언어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폭염 속에서 일하는 농부의 땀방울, 미세먼지 속 출근길 시민의 기침, 비닐하우스에 홀로 앉아 있는 노인의 한숨 속에도 이 질문은 존재한다.
기후위기, 인간의 문명이 스스로에게 던진 경고
21세기의 인류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이했다.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1.5℃ 이상 상승했고, 북극의 빙하는 급속히 녹고 있다. 기후과학자들은 경고한다. “이대로라면 2050년, 인류는 지금의 지구를 낯설게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단순히 온도나 날씨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문명의 구조적 한계이며, 스스로에게 던진 철학적 질문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성장해야만 했는가?”
“언제부터 자연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했는가?”
지난 200년간 인류는 기술과 산업의 힘으로 ‘진보’를 이루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진보는 지구의 허락 위에 세워진 불안정한 집이었다. 탄소와 플라스틱, 쓰레기와 소음이 그 기초를 이뤘고, 그 위에서 인간은 잠시의 편리함을 얻은 대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잃어버렸다.
기후과학자 제임스 핸슨(James Hansen)은 말했다.
“지구는 이미 우리에게 수많은 경고를 보냈다.
그러나 문제는 지구가 아니라, 그 경고를 듣지 못하는 인간이다.”
기후위기는 자연의 복수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붕괴, 즉 인간이 자연과 맺은 근본적 관계의 단절이다.
우리가 지구의 주인으로 착각하는 순간, 자연은 ‘타자’로 변했고, 그 결과 지구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환경 불평등, 위기의 무게는 모두에게 같지 않다
기후위기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같지 않다. 환경 불평등(Environmental Inequality)은 이 위기의 불공정한 구조를 드러낸다.
폭염 속에서 에어컨을 켤 수 없는 사람,
미세먼지가 가득한 날에도 야외에서 일해야 하는 노동자,
해수면 상승으로 고향을 잃어가는 섬 주민,
그리고 쓰레기 매립장 근처에서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
이들은 모두 환경의 비용을 대신 지불하는 사람들이다.
기후위기는 눈앞의 자연재해로만 오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먼저 끊는다. 한국에서도 이미 이런 불평등은 선명하다. 수도권은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외곽 지역에 소각장을 짓고,대도시는 깨끗한 수돗물을 쓰지만, 농촌은 지하수 오염에 시달린다.
공단 주변의 아이들이 천식을 앓고, 도심의 아파트 단지는 녹색 공원을 품지만, 시골 마을에는 농약 냄새가 가득하다.
환경운동가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This Changes Everything)≫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후위기는 단지 탄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불평등의 문제이며, 정의의 문제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진정한 출발점은 기술이 아니라 정의(Justice)이다.
누가 더 많이 배출했는가보다, 누가 더 큰 피해를 감당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후정의(Climate Justice)의 핵심이다.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문명의 중심이 흔들릴 때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얼굴이다. 도시는 팽창하고, 농촌은 비어간다. 인구는 도시로 몰리고, 자본은 도시에 쌓인다. 그러나 식량, 물, 에너지는 여전히 농촌이 생산한다.
도시는 농촌에 기대지만, 농촌은 도시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226개 기초지자체 중 절반 이상이 ‘인구소멸 위험지역’이다.
청년이 떠나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에는 빈집과 폐교만이 남는다. 시장은 닫히고, 버스는 끊기고, 돌봄은 사라진다.
이것은 단순한 인구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구조가 해체되는 문제다.
도시는 효율과 속도를 가치로 삼지만, 농촌은 느림과 관계를 가치로 삼는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도시의 언어만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결과 농촌의 느림은 ‘낙후’로, 공동체의 협력은 ‘비효율’로 불렸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위험사회≫에서 말했다.
“현대의 위험은 기술이 만든 부작용이자,
사회적 불평등이 낳은 그림자이다.”
도시의 성장 이면에는 농촌의 소멸이 있다.
이 불균형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문명은 균형을 잃은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무너질 것이다.
지역소멸, 사라지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한국의 지방 곳곳은 지금 ‘소멸’의 언덕을 향해 가고 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우체국이 사라지고, 버스가 멈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은 언젠가 역사 속 한 문장이 된다.
그러나 지역의 소멸은 단지 숫자의 감소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상실이며, 공동체의 해체다.
마을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다. 그곳은 사람이 관계를 맺고, 노래와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온 기억의 장소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는 말했다.
“우리가 기억의 장소를 만든다는 것은,
이미 살아 있는 기억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지금 전국의 ‘기억의 장소’들이 사라지고 있다.
농촌의 폐교, 오래된 시장, 버려진 정자 등
이 모든 장소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이곳을 잃었는가?”
지역을 되살리는 일은 단순한 경제적 복원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윤리와 관계의 회복, 그리고 다시 살아갈 이유의 회복이다.
생태문명 전환, 인간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이 모든 위기의 밑바탕에는 하나의 공통된 뿌리가 있다. 바로 인간 중심적 세계관(Anthropocentrism)이다.
근대 이후의 문명은 인간을 만물의 중심에 두었다.
자연은 ‘자원’으로 불렸고,
숲은 ‘목재’가 되었으며,
강은 ‘전력 생산의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은 지금 한계에 부딪혔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문명은 스스로의 불균형 속에서 무너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환경보호’가 아니다.
문명 자체의 가치 전환, 즉 생태문명(Ecological Civilization)으로의 전환이다.
미국의 문화역사학자이자 생태신학자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지구의 꿈(The Dream of the Earth)≫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구의 이야기 속 한 문장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장을 망각한 채,
마치 우리가 이야기를 쓴 작가인 양 행동해 왔다.”
그에게 생태문명 전환은 단지 환경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우주의 ‘참여자’임을 다시 인식하는 일이었다.
베리는 “인간의 경제는 생태의 일부이며,
자연과 분리된 경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활동은 지구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지구 윤리(Earth Ethics)’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인간 중심의 윤리를 넘어, 모든 생명과 존재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새로운 윤리적 틀이다.
미국의 생태학자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는 ≪모래 군의 열두달(A Sand County Almanac)≫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은 정복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토지와 동등하다.”
그의 ‘토지 윤리(Land Ethic)’는 자연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즉, 산과 강, 동물과 흙 모두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이 철학은 단순히 환경운동을 넘어 도시계획, 농업, 건축, 경제의 방향까지 새롭게 정의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생태마을, 전환도시, 지속가능한 지역공동체 운동은 레오폴드의 토지윤리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른 네스(Arne Næss)는 ‘심층 생태학(Deep Ecolog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말했다.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
인간은 그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제한해야 한다.”
심층 생태학은 단순히 환경보호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구제’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는 철학이다. 이 사상은 특히 북유럽과 북미의 환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전 세계의 ‘생태적 전환 교육’, ‘지속가능한 공동체 운동’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생태문명 전환의 길
이 세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중심’을 내려놓고 ‘생명의 중심’을 회복하라고 말한다. 생태문명은 기술적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태도와 관계의 혁명이다.
더 많이 가지는 대신, 함께 나누는 삶.
더 빨리 생산하는 대신, 느리게 순환하는 삶.
자연을 이용하는 대신, 자연과 협력하는 삶.
이런 변화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생활의 가장 작은 습관에서 시작된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일,
마을 시장에서 지역 농산물을 고르는 일,
나무를 심고, 걷고, 비를 기다리는 일.
그 모든 것이 문명의 전환의 첫걸음이다.
새로운 문명을 향한 질문
이제 인류는 문명의 기로에 서 있다. 우리는 기후위기와 불평등, 지역소멸이라는 세 개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단지 “이 위기를 어떻게 막을까?”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문명을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질문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철학의 문제다.
과거의 질문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우리의 질문은 미래 세대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생각하는 것은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 시대의 질문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기후위기 속에서도, 불평등 속에서도,
사라져가는 마을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이어가야 한다.
그 물음이 바로 생태문명의 씨앗이다.
https://youtu.be/XAi3VTSdTxU?si=SOQPT6pdaPR4aza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