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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plexArea Jul 27. 2017

[황정은 읽기] 기쁨의 조우

황정은 단편:「명실」「웃는 남자」에 대한 하나의 실험(극)

기쁨의 조우

말-건넴에 대한 하나의 실험(극)     


   


그리고 만났다     

실리는 언젠가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새벽에 벌판에 당도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에 관한 내용이었다.
(황정은,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03쪽)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소설의 첫 문장(“그리고 그녀는 노트가 한 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황정은, 「명실」, 『아무도 아닌』, 91쪽)은 ‘그리고’로 시작된다. 접속사와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여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마리코를 기다리는 실리의 화자가 마주하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여백이다.    

  

마리코는 대부분 늦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은 기다리는 거야.
마리코?
그 사람이 기다리는 사람의 이름이 마리코……
그래.
그런데 그 사람은 이제 앉고 싶어. 앉고 싶다. 앉고 싶다고 생각하며 벌판에 서 있는 거야.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04쪽)     


풀이 한가득 자라난 벌판에서 그는 지평선을 바라본다. “풍성하게 자란 풀과 풀이 서로 닿는 소리” 그리고 “바람의 방향이 물결처럼” 몸을 스친다. 지평선에서 마리코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마리코가 대부분 늦는다는 사실과 함께 어쩌면 벌판에 당도한 적이 없음을 속삭이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지금-여기 벌판에서 말이다.      


벌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과 책상과 의자. 그건 꼭…… 죽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같다고 그녀가 말하자 실리는 그런가, 라고 대답했다.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다리는 이야기. 실리는 그걸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를 언제까지고 벌판에 내버려둔 채로 죽고 말았다. 실리의 화자는 내내 벌판에 있는 것이다. 마리코가……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갈까봐 앉지도 못하고 서서.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04-105쪽)     


지평선을 바라본다. 하지만 지평선의 평야는 인간에게 결코 허락한 적이 없었다. 지평선과의 거리는 끊임없는 지연으로 남아있다. 행위보다 앞선 행위, 자신의 한 걸음보다 반 발 앞선 그 발자국은 바로 종결을 종결짓지 못하게 하는 ‘그리고’이다. 결코 도달한 적이 없었고, 조우하지도 않았음에도 우리는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을 (조우하기를) 기대한다.      


앉아서 마리코를…… 실리를 기다렸다.
이렇게 앉아서 몇 번의 겨울을 더 맞게 될까. 몇 번의 봄과 몇 번의 여름을. 그녀는 생각했다. 죽은 뒤에도 실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난처한 상상인가.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10-111쪽)     


그러나 이러한 허망한 기다림은 (욕망)대상의 상실을 못 이긴 뒷걸음질, 즉  ‘잔혹한 낙관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금-여기 비존재로서 부재함과 동시에 약속을 보장하는 도래할 존재로서 마리코와 실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음: 어떻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비존재가 더 현실적일 수 있을까?

따름 물음: 지연-예정-된 마리코와의 조우는 어떠한 현실인가?      


    

리토르넬로: 리듬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보이는 미소는 형성되는 데 독특한 시간의 윤곽선이 있다. 그 리듬은 매번 반복적이지만 차이를 생산한다. 연인의 얼굴에서 읽히는 정서의 풍부함이 이를 설명해준다.

수백 가지의 미소가 있다. 비슷하지만 평소보다 더욱 빠르거나 보다 느린, 독특하고 구체적인 하나의 미소가 있다. 그 미소에서 읽히는 것은 바로 시간의 리듬이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옥탑이 최선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도 옥탑이었다. 크게 기울어진 비탈 아래쪽에 있었다. 작고 좁고 더러운 건물이었지. 디디는 일을 쉬고 그 집에 머무르는 날이면 아래쪽 길이 내다보이는 곳에 의자를 가져다두고 앉아서 잡지나 소설 책을 읽었다. 그러다 퇴근해 돌아오는 나를 발견하면 이야, 하고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아래쪽에서 바라보면 디디의 머리가 옥상 가장자리로 불쑥 나와 있었다. 둥근 단발머리 때문에 작은 버섯처럼 보이는 머리가…… 디디는 제때 나를 발견하려고 내가 도착할 무렵엔 자주 고개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 한 줄을 읽고 고개를 들어 비탈을 바라보고 다시 한 줄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어 비탈을 바라보고. 더 행복해지자, 담배와 소변 냄새가 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며 나는 다짐하고는 했다. 행복하다. 이것을 더 가지자. 더 행복해지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것 한가지를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계단에 이르면 디디가 햇빛에 빨갛게 익은 얼굴을 하고 마중나와 있었다.
( 황정은, 「웃는 남자」,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76쪽)     


디디의 미소, 어제보다 붉었던 노을 그리고 그 채도와의 반복적 조우는 윤곽선의 지문만큼이나 구체적이고 다양하다. 「웃는 남자」에서 우리는 접혔다가 펼쳐지는 시간의 지층을 읽을 수 있다. 디디가 옥상 가장자리에 앉아 반복적으로 들어 올렸던 고개의 움직임과 그 속도. 비탈길을 오르락 했던 발걸음은 매 순간 무게를 달리한다. 소리가 사위를 주름 접는다. 조금 지쳤을 어느 날, 햇빛에 빨갛게 익은 디디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발끝에 사뿐함이 피어오른다. 정서적 시간의 변주, 이 조우의 독특한 리듬에서 이들은 행복을 찾아냈다.

기호의 전달이라기보다는 힘의 변환(변형)에 가까운, 어쩌면 전(前)인격적인 힘의 운동이 그것이다. 우리는 의식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 사랑의 사인(Sign)에 감정이 먼저 반응하듯이, 다시 재현되지 않을 그 미소의 독특함을 이 마주함에서 길어낼 수 있다.

이들의 마주침은 양피지 위에 덧쓰기, 지웠던 흔적 위에 새롭게 쓰고 다시 지워는, 흔적에 흔적을 더해 무한히 반복하는 글쓰기적 조우이다. 만약 이러한 힘-마주침이 전(前)의식적 침투라면, 이것은 낙형(烙刑)이 아닐까.     


물음: 해석 이전의 촉발, ‘미소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따름 물음: 낙형처럼 각인되는 마주침, 그것이 쓰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리     

오랫동안 나는 그 일을 생각해왔다.
( 황정은, 「웃는 남자」,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65쪽, 176쪽)     

「웃는 남자」의 첫 문장―오랫동안 나는 그 일을 생각해왔다―이 후에도 반복되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반복-강박적으로 생각한 그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다. 생각해내는 것일까, 아니면 하게 되는 것일까. 문제는 사유의 피동성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던졌던 물음(따름 물음)을 이어 받아 소리, 색채, 미소의 리듬이 전(前,)해석적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달군 쇠붙이로 피부를 지지는 고문(낙형), 이것이야말로 형벌이자 강렬한 ‘터치’이다. 바로 이 손끝, 그곳은 시작인가 끝인가. 신체에서 신체로 넘어가는 도약점인가, 아니면 단절과 차단을 의미하는 한계일까.     


오랫동안 나는 그 일을 생각해왔다.
나는 저녁에 디디를 만났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처럼 시간을 맞춰 바깥에서 만났다. 정류장 근처 트럭에서 만두와 어묵 냄새가 났고 디디는 그걸 먹고 싶어했다. 거리에서 선 채로 만두를 몇 접시 먹을까 망설이다가 우산이 거추장스러워 그냥 집에 돌아가 저녁을 먹기로 했지. 배고픈 채로 버스를 탔는데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내가 먼저 올라타 손잡이를 잡고 섰고 디디가 바로 곁에 와 섰다. 첫 번째 좌석 앞이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누군가의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이 자글자글 들려올 정도로 버스 안은 고요했다.(황정은, 「웃는 남자」,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79쪽)     


디디의 얼굴 너머로 와이퍼로 닦이고 있는 전면창과 그 창을 가득 메운 검은 도로가 보였다. 그건 내가 일상적으로 오가는 길이었지. 출근길과 퇴근길에. 창밖은 검정과 주홍, 낯익은 간판 불빛들은 흘러내리는 빗물로 경계가 번져 보였고 그런 광경들이 계속해서 뒤쪽으로 흘러갔지. 그 순간을 반복해 생각한다. 어느 순간 집에 호박이 있다고 디디가 말했던 것 같다. 집에 호박이 있어. 그렇게 말을 했거나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소리가 사라진 광경으로 기억하고 있다. 갈림길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멈춰 서 있을 때였다. 디디는 여전히 머리의 무게를 팔로 지탱하며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호박이…… 이윽고 금속조각으로 가득찬 자루가 바로 귀 곁에서 터진 것처럼 요란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런데 이것은 상당히 왜곡된 기억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니까. 아주 짧지만…… 돌이키고 돌이키기를 거듭하는 동안 몇 개의 겹으로 늘어나버린 그 순간, 그 최초의 충격이 있었을 때…… 구 인승 승합차와의 충돌로…… 작은 유릿조각들과 빗물, 차가운 빗물이 바늘처럼 얼굴에 튀어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다른 차원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버스가 크게 회전했을 때……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있는 힘껏 붙들었지. 그 짧은 순간…… 나는 디디가 아니라 가방을 붙들었지.
가방을.
(황정은, 「웃는 남자」,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81쪽)     


되감기와 빨리감기. 10초건너뛰기와 일시정지. 그곳 버스 안은 기묘한 리듬과 시간의 주름(접힘/펼쳐짐)이 있다. 이것은 오랫동안 흔적 위에 흔적으로, 지워짐과 다시 쓰기의 연속이다. 행위 하는 능력과 행위 받는 능력, 그 사이 한 가운데에 마주침이 있다. 디디의 벌겋게 익은 얼굴, 마리코의 약속, 그리고 얼굴로 튀어 오르던 유릿조각과 부여잡은 가방, 가방. 이 자리, 경계의 한 가운데야말로 글쓰기와 마주침(조우)이 발생하는 자리이다.      

 

물음: 그러나 문자로 기록된 문학작품의 의미는 어째서 하나의 터치(몸에 대해)로 다가오는 것일까.

**조우의 촉발이 기호 전달이라기보다 힘의 변환이라고 하였는데, 문학은 기호가 아닌가?

따름 물음:  글쓰기란 무엇이고, 그 자리가 흡사 몸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향해 건네다     

마리코는 어느 방향에서 올까. 조금씩 방향을 바꿔 서며 지평선을 바라보는 거야. 그런데 이 벌판에 온전히 혼자인 것은 아니라서……
누가 있어?
누가 있지. 책상과 의자가.
책상과 의자를 무엇 아니고 누구인 것처럼 실리는 말했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실리는 그런 이야기를 쓰겠다고 말했고 그녀는 밤에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04쪽)     


마리코를 기다리던 실리의 화자 곁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그는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행여나 도착할 마리코(지평선)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명실에게도 그러한 책상과 의자가 있다. 책과 이야기로 씨름하며 괴로워하는 실리의 모습을 명실은 잊지 못한다. “그까짓 것, 그까짓 것들이 실리를 죽였다”라고 명실은 생각했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았다.     


해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첫 단락을 시작하지 못한 채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08쪽)     


명실은 실리의 이야기를 완성시키려 했다. 그러기 위해 몇 번 혹은 몇백 번 책상 앞에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첫머리인 ‘그리고’가 여백을 지시하는 것처럼 그녀의 문장은 부재를 지시한다. 명실이 실리에게 들었던 그 이야기들, 분명 생각해냈지만 어째서인지 글로써는 한없이 미끄러졌던 실리의 이야기가 마치 여백처럼 앞에 놓여있다. 명실의 글쓰기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실리의 이야기, 실리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것을 품은 자신의 몸.


이렇게 해서 존재론은 곧 글쓰기임이 판명 난다. ‘글쓰기’는 어떤 기호작용에 의한 명시나 증명이 아니라 의미와 닿기 위한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터치이고 접촉이되 일종의 건넴인 그것. 글을 쓰는 사람은 잡거나 손에 쥐는 방식을 통해 접촉하지 않는다.
(장-뤽 낭시, 『코르푸스』, 문학과지성사, 21쪽)    

 

명실은 실리의 이야기를 부여잡고 그것을 고정시킬 수 없었다. 명실은 오직 손끝으로만 실리의 살갗을 터치했을 뿐이다. 그 순간의 스침 속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감정은 누구에게로 귀속되는가. 그리고 누구로부터 발원하는가. 접촉이 일어나는 가운데 낯섦은 여전히 낯섦을 도래시킨다. 그 기묘한 조우, 실리의 부재 속에서 명실은 실리를 향해 말-건넴을 시도한다. 더 이상 실리의 화자가 아니다.  말-건넴의 시작과 끝, 이야기의 소유권은 손끝에 있다. 화자는 터치이다.     


그것은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실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녀는 실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그 이야기의 화자라면…… 나는…… 새벽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 벌판에.
저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벌판에 한참 서 있었다. 마리코를 기다렸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 상당히 오래 기다렸는데 그것은 괜찮다. 마리코는 대부분 늦으니까.
다만 앉고 싶다.
앉으면 되지.
앉으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잠시 앉았으나 일어났다. 벌판 가득 풀이 자랐다. 그 속에 앉으면 길게 자란 풀에 묻혀 보이지 않을 것이다.(중략) 나는…… 이 벌판에 혼자인 것은 아니다. 책상과 의자. 그게 있다. 나처럼 절반쯤 풀에 묻힌 채로 놓여 있다. 이 책상과 의자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한낮엔 햇볕에 노출되고 한밤엔 이슬에 노출될 테니까.
조금만 앉아 있자.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앉아서 마리코를…… 실리를 기다렸다.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09-110쪽)     


우리가 던졌던 물음,

“어떻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비존재가 더 현실적일 수 있을까”     


우리가 던졌던 물음,

“낙형처럼 각인되는 마주침, 그것이 쓰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글쓰기란 무엇이고, 그 자리가 흡사 몸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글쓰기는 스스로를 건넨다. “쓰는 것은 생각을 몸을 향해, 다시 말해 생각에 간극을 벌리고 낯섦을 초래하는 바로 그것 쪽으로 건네”어 몸을 연다. 이 기획에서 제기한 물음에 답을 하지 안/못한 채 명실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인용한다. 우리는 이미 ‘같은’ 문장을 읽었었다.     


앉아서 마리코를…… 실리를 기다렸다.
이렇게 앉아서 몇 번의 겨울을 더 맞게 될까. 몇 번의 봄과 몇 번의 여름을. 그녀는 생각했다. 죽은 뒤에도 실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난처한 상상인가.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110-111쪽)     


물음:

따름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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