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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plexArea Sep 03. 2017

[프로젝트] 우리는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손과얼굴 감각의 제국 [감각워크숍: 짚]

우리는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기억의 표면은 잘 다져진 도로처럼 곧게 뻗어있다. 그곳에 있었을 돌부리는 으깨지거나 뿌리 뽑혀 다른 곳으로 버려졌다. 한 번쯤 인간의 발을 붙잡았을 울퉁불퉁한 것들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기억들은 우리로부터 탈구 되었다. 그러나 틈(균열)이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따금 어떤 목소리를 들려준다. 기억은 목소리의 잔향을 붙잡아야 한다.

과거에 대한 현재의 ‘부름’은 언제나 지금(jetzt)-다시 반복된다. 지금으로부터의 무한한 반복적 실천, 이것이 바로 기억이다. 양피지 위에 덧쓰기, 지웠던 흔적 위에 새롭게 쓰고 다시 지우는, 흔적에 흔적을 더한 것이 기억의 문법이다. 기억의 시제가 지금-다시인 이상, 기억의 완결은 불가능하다. 역사가 멈추지 않는 한, 과거에 대한 최후의 발언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와 현재는 서로를 횡단한다. 반복적 제스처(기억/실천)는 새로운 의미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카이로스매 순간이 유일한 기회의 시간이다.

그렇기에 시점의 문제는 오직 현재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다. 이는 인간언어의 본질과도 관련이 깊다. 인간은 신이 말씀으로 창조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이며, 오히려 신은 창조의 매체였던 언어를 인간에게 방출하였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인간언어는 신의 말씀(창조적 무한성)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언어는 신적 무한성에 내밀하게 참여하고 있다. 명명하기, 모든 존재 가운데 인간만이 자기 자신(사물)을 명명할 수 있다. 이러한 ‘이름(고유명)붙이기’는 유한언어와 무한언어의 경계이다. 인간언어는 말씀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세계를 이름으로써 인식한다. 창조는 불가능하지만, (불완전한)인식은 가능하다. 낙원은 없지만, 세계가 있다! 인간언어의 불확실성▪불확정성은 한계가 아닌, 언어의 전달 가능성, 번역의 가능조건이 된다.     


과거에는 우리에게 전해져야 할 목소리가 있다. 그런데 이 목소리는 무력한 표현, 언어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커다란 슬픔의 단말마이자 탄식이다. 탄식은 언어가 아니므로 우리는 과거와 수다를 나눌 길이 없다. 그렇기에 과거를 다시 불러야만 한다. 그렇다, 부름 문제는 번역의 문제이다. 인간언어는 사물언어에 대한 번역이고, 사물언어와의 접촉(수용성)으로 발화된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더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 있지 않을까?”     

과거와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합의)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당파성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언약일 것이다. 이 약속에 따르면 우리는 미약하게나마 과거의 누군가가 기다렸을 사람이며, 오늘의 우리는 미래의 누군가가 기다릴 사람이다. 과거를 향한 이와 같은 -건넴, 과거에 대한 현재의 부름, 우리가 과거를 지금-다시 명명하고자 할 때 그 행위의 고유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과거의 이미지에 말-건넴을 시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존재)을 건네는 것과 같다. 기호, 이 개념은 얼마나 척박한가. 인간언어는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자신을 건넨다. 언어는 전달 가능한 모든 것을 전달하며,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듣게 한다. 그 어떤 탄식이라도 전달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즉, 번역 가능하다. 그러므로 쟁취(기억)해야 하는 것은 미래가 아니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폭발시킬 수 있다.      


“현재는 다수의 가능한 미래들로 열려 있다.”


“과거의 열림과 미래의 열림은 밀접하게 결합된다.”     

고유명으로서 조우하는 이 섬광 같은 이미지들은 과거시제에 갇혀있지 않다. ‘충만한 시간(카이로스)’은 과거를 폭발물로 채우고 평평하게 곧게 뻗은 역사를 향해 도화선을 당긴다. 순간, 현재가 솟구친다. 섬광은 바로 이 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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