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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plexArea Sep 11. 2017

[독서노트] <젠더 트러블> 발제(1)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발제: 개정판 서문부터 제1부 2장까지

<젠더 트러블발제(1)     


개정판 서문(1999)     


Ⅰ-1 페미니즘 안에서의 배타적 젠더규범에 대한 비판

버틀러는 본원적 비평의 전통아래에서 페미니즘을 검토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비평적 자세는 자신이 페미니즘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호전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버틀러는 민주주의적 삶을 약속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자기 비판적 비평과 비판을 위한 비판, 즉 스스로를 완전히 해체하는 식의 비평을 구분한다. 버틀러는 전자를 후자의 무분별한 해체작업으로 오독할 것을 우려했다. 그런데 어째서 버틀러는 그리고 왜 적의를 느꼈던 것일까. 즉 이 저서가 페미니즘 운동 자체를 무력화 시키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말이다. 문제는 버틀러가 본원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비평의 지점이 바로 페미니즘 운동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보편적 범주로 사용되는 ‘젠더’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성애적 범주에 국한된 ‘젠더’를 해체하고 하는 것이었다. 페미니즘 이론에서 관행적으로 적용되는 배타적 젠더 규범이 때때로 호모포비아를 낳는다고 판단하였다. 특정한 젠더의 표현물이 이상화되는 형상, 즉 페미니즘 안에서의 배제적 젠더규범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시론적 성격이 강하다. 버틀러의 범주 해체작업은 다시 종합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버틀러는 “이 책의 요점은 독자들에게 모델이 되어줄, 새롭게 젠더화된 방식의 삶을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라며 책의 요점을 정리하였다. 결국 가능성의 장이라는 것은 언제나 폐쇄로를 뚫는 것이기에, 이것 자체가 정답이 될 수 없다. 정답은 다시금 외부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시도하는 본원적 비평은 정답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제기이다.

젠더에 대한 근본적 의문제기. 앞으로 확인하겠지만, 만약 젠더라는 것이 일종의 권력의 효과(담론의 산물)라면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레즈비언 실천 행위가 페미니즘 이론을 증명”한다는 문장을 검토해보자. 물론 버틀러는 이러한 관념을 거부한다. 페미니즘 운동의 실천적 차원이 거의부의 이유는 아니다. 버틀러는 이 책을 통해서 물음의 위치를 바꾸려고 했다. 즉 “어떻게 비규범적 성의 실천들이 분석범주로서의 젠더의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는가?” 그러니까 요점은 레즈비언-페미니즘 운동의 정치적 신념의 성애적 완성이 아니다. 어째서 ‘레즈비언’이라는 비규범적(비이성애적) 범주가 규범적 범주를 교란 가능하게 하였는가. “어떻게 특정한 성적 관행이 남자는 무엇이고 여자는 무엇인지를 강제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들은 버틀러의 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버틀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주체(subject)대신 행위주체(agent)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의 영향으로 보인다. 여기서 행위주체를 버틀러 식으로 해석한다면, 규범적 섹슈얼리티가 규범적 젠더를 만들고, 주체는 이러한 젠더의 위치에서 이탈되지 않기 위해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되는’ 것이다. 즉 주체는 담론의 장 안에서 그 권력의 자장으로 인해 대리인(agent)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버틀러는 저항 가능성을 본 것이다. 버틀러의 물음(“어떻게 비규범적 성의 실천들이 분석범주로서의 젠더의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는가?”)은 곧바로 정치적 저항문제를 겨누고 있다. 비규범적 성의 실천은 바로 규범에 대한 저항행위 즉, 지배적 담론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레지스탕스의 게릴라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버틀러는 운동의 보편적 범주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비판을 제기하고자 한 것이다.      


트랜스섹슈얼은 ‘여자’나 ‘남자’라는 명사로 기술될 수 없으며, 새로운 정체성‘인’ 지속적 변형, 실은 젠더화된 정체성의 존재를 의문시하게 만드는 ‘사이공간’을 입증하는 능동태 동사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사이공간이자 동사로서의 주체. 앞서 보았듯이 불변하거나 고정점으로서의 주체가 아닌 가변적이고 구성적으로 변모하는 주체가 바로 이 소수자 정치학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 담론에서의 잡음, 페미니즘 내에서의 수많은 논쟁과 문제제기는 모두 젠더 트러블의 증거인 셈이다.

버틀러는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서 젠더의 수행성에 대한 하나의 단초를 얻게 된다. 이 우화는 이렇다. 시골 사람은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법 앞에 섰다. 그런데 그 문 앞에는 덩치가 큰 한 명의 문지기가 있는 것이다. 시골 사람은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지기에게 허락을 구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시골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 후,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문지기는 “가능한 일이지”라고 호쾌하게 대답했지만,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라고만 한다. 이렇게 여러 날 여러 해가 지나고 시골 사람은 문 앞에서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한다. 임종을 목전에 둔 시골 사람은 문지에게 묻는다.     

 

지난 수년 동안 나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가요?” 문지기는 그 시골 사람이 이미 임종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고, 희미해져가는 그의 청각에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 소리친다. “이곳에서는 너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단지 너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나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아야겠네.(프란츠 카프카, 『변신(단편전집)』, 솔, 227쪽)     

오직 시골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지만, 결코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바로 법이다. 이 메타포에  대해 버틀러는 “권위적인 의미에 노출되리라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 권위가 부여되고 설정되는 수단”이라고 해석한다. 바로 이 본질(법)은 바로 본질에 대한 기대, 즉 반복적이고 의례적인 행위(시골 사람의 행위를 봐라)로 인해 역으로 만들어진다. 결국, 젠더의 내적본질은 “일련의 지속적인 행동을 통해 만들어지며, 젠더화된 몸의 양식화를 통해 그 위치가 정해진”다. “당연시된 제스처의 환격적 효과”를 통한 우리의 기대가 바로 본질(젠더)을 생산하는 것이다.           



Ⅰ-2 문체의 문제와 기술의 규범적 성격

주디스 버틀러의 문체가 난해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그녀의 철학적 바탕 또한 기인하겠지만, 어느 정도 의도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그 문체라는 것을 복합적인 영역으로 본다. (……) 게다가 문법이나 문체는 둘 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못하다. 지적 화술을 지배하는 법칙을 배운다는 것은 규범화된 언어를 주입당한다는 뜻이고, 그에 순응하지 않은 대가는 가독성 자체의 상실이 된다. (……) 문법이 사고, 특히 사고 가능한 것 자체에 부과하는 규제를 고려해 볼 때, 공인된 문법이 급진적 관점을 표현하는 최고의 전달수단이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문법이라는 것은 일종의 체계(랑그)이다. 공인된 문법 혹은 단어의 용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배적 담론을 전제한다. ‘공인’되었다거나 ‘지배적’이란 표현의 의미는 이렇다. 기의는 어떤 특수한 담론에서만 그 고정점을 부여받는다. 이것은 주체를 행위주체로 재해석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의미 자체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적이며, 가변적이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그렇기에 헤게모니 투쟁은 이러한 의미를 둘러싼 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자유를 둘러싼 수많은 거인들의 싸움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한 ‘분명히 한다’ 혹은 ‘간결하다’라는 기호는 그 자체로 명징한가? 오히려 명징성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사태를 단순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버틀러가 예로 든 “한 가지만 분명히 해둡시다”라는 정치인들의 레토닉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콤펙트한 명징성에 사태의 복잡성을 놓치고 만다. 위와 같은 작업들은 앞서 보았던 버틀러의 비평적 자세와도 상통한다.      


이러한 탈자연화의 글쓰기는 단순히 언어와 유희하려는 욕망에서 행해지거나, 몇몇 비평가들이 추측하듯 ‘진짜’ 정치의 자리에 연극적인 익살극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 가능성에 대한 탐구, 대안보다는 끊임없이 시도되는 낭만주의식 토론(사실 부정적 뉘앙스가 강하다)이야말로 정답이라는 허구적 명징성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또한 『젠더 트러블이』젠더를 규범적·규정적으로 설정하지 않는 것에는 또 하나의 비평적 장점이 있다. 젠더에 대한 기술적 설명(‘-해야 한다’ 식의 규범을 담지 않고 그것에 대한 가능조건을 서술하는 방식)에는 이미 규범적 성격이 내재되어 있다. “무엇이 ‘젠더’의 자격을 부여하는가 하는 질문은 이미 그 자체가 폭넓게 규범적인 권력 작용을 입증하는 질문”이다. 만하임이 말하는 자유 부동적 지식인이나 하버마스 식의 이상적 발화상황(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 소통)은 이미 그 개념설정(구분법) 자체에 특정한 술어 구조가 들어있다. 그렇기에 버틀러는 무엇이 전복적이거나 비전복적이다 라는 구분, 또는 좌우 입장을 전제로 하는 이분법적 대립을 거부한다. 오히려 버틀러는 ‘우클릭’보다 상품화된 ‘전복’을 더욱 경계하다.      

자유 부동적 지식인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반화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 너머의 통합점에 도달 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때 자유 부동적 지식인들은 기존의 어떤 이데올로기나 계급에도 동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치중립성의 기준에 합당한 존재로 나타난다. 


은유가 시간이 흘러 개념으로 굳어지면서 자신의 은유성을 상실하듯, 전복적 수행도 반복을 통해, 가장 중요하게는 시장 가치를 수반하는 상품문화 속에서 ‘전복’이 반복되면서 언제나 죽은 상투어가 될 위험에 놓인다. 전복성의 범주를 명명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실패할 테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버틀러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다. 결국 그녀가 지향하는 것은 ‘해체’의 작업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적 태도가 곧 ‘해체론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버틀러는 이 꼬리표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해체론자’라는 꼬리표가 또한 붙는다면 타협하기는 더욱 곤란한 상황이 된다. 이것은 해체 비평을 실천하는 그 누구도 사용한 적이 없는 용어이자 독해라는 가변적 실천을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으로 변환시키는 용어이다.(주디스 버틀러 외,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도서출판b, 192쪽)  

   

가변적 실천, 이것은 일종의 독해이자 끊임없이 열린 담론으로 이끄는 행위이다. 어느 진보적 담론이라도 그것이 공인되는 순간, 지배적 담론으로, 권력 담론으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아니 오히려 사회언어를 사용하는 우리에게 숙명적인 부분이다. 젠더에 대한 전복적 해체는 바로 지배적 담론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젠더의 당연시된 지식이 실제에 대한 선제적이고 폭력적인 경계선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확실히 규범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 비실재, 인식 불가능으로 간주되어온 몸들에게 합법성을 확대하려는 주장일 것이다.               



초판 서문(1990)     

현대 페미니즘의 논쟁에 있어서 젠더의 불확정성은 페미니즘 운동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젠더라는 범주의 특징적 상황을 내비치고 있다고 여겨진다. 젠더에 대한 규범적 규정, 즉 지배적인 법(권력·담론·상징)은 트러블 생산을 필요조건으로 갖는다. 결국 버틀러는 페미니즘 논쟁에서의 트러블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가능성의 장을 넓힌다. 

젠더의 불확정성은 권력(관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푸코는 니체식의 계보학을 참고하여 권력과 성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시도한다. 푸코에게 있어 주체는 권력(담론)의 효과이다. 주체 혹은 성은 그 자체로 진리이거나 내재적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특정 담론의 효과로써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계보학은 진리는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진리는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정체성의 본질을 묻는 것이 아닌, 정체성의 가능조건을 검토하며 권력관계를 폭로하는 것이다. 결국 정체성이라는 고정된 범주는 그 자체로 트러블이 된다.               



1부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     


Ⅲ-1 페미니즘 주체로서의 ‘여성들’

1장은 논쟁의 폐부를 직접적으로 찌른다. 바로‘여성의 범주’라는 보편 주체를 비판대 위에 세우는데, 이 같은 행위는 아주 첨예한 논쟁을 일으킨다. 종래의 페미니즘 담론에서는 ‘여성’은, 맑스 이론 내에서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위치를 점유한다. 프롤레타리아가 맑스주의에서 보편적 인식의 주체임과 동시에 혁명의 주체인 것처럼 ‘여성’은 “페미니스트의 이익과 목표를 창출해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재현이 추구하는 주체”이다. 결국 페미니즘 운동에서 핵심 코어인 셈이다.

그런데 이 ‘재현’이라는 용어는 정치에서 아주 논쟁적이다. 재현의 정치, 대표성의 정치는 오늘날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재현(representation)은 그 언어의 정의상 원본을 전제한다. 이 말을 정치성으로 옮기자면, 페미니즘 운동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 일반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원본의 지위는 어떻게 정위되는냐는 것이다. 푸코는 전통적인 권력의 두 가지 이미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사법적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억압적 모델이다. 이 담론에 따르면 권력은 부정적인 역할, 즉 주체의 억압하고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장치이다. 그런데 법이 주체를 생산한다면, 오히려 주체가 그 법의 효과라면 이 재현의 정치는 전투에서 가장 핵심적 전장이 된다.     

재현(Representation)
“고중세에 이 말(미메시스)은 ‘재현’이었다. 현실세계가 초월세계를 재현하고 있다는,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었다(특히 플라톤의 경우). 근대에 이르러 이 말의 일차적 의미는 ‘표상’이 된다. ‘대상’(주체에 ‘대’해서 있는 것)을 주체가 표상한다는 사유 구도를 함축하게 된다. 더불어 이 말은 ‘대의’라는 의미도 담게 되는데, 대의정치란 곧 의회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신하는 체제이다”(이정우, 『개념-뿌리들』, 그린비, 191쪽)


여성을 페미니즘의 ‘주체’로 재현하는 언어와 정치학의 사법적 구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담론적 구성물이자 당면한 재현 정치학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즘 주체는 자신이 해방시켜야 할 바로 그 정치체계에 의해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판명된다.     


결국 해방되어야 할 ‘여성’주체가 본래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담론의 효과로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버틀러가 문제제기 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본질로써 오도된 원본개념이다. 즉,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이런 체계에 무비판적으로 호소”는 원본과 모사품이라는 이분법적 틀에 갇히고 만다.

이러한 원본개념은 사법권력을 강화시킨다. 사법권력은 자신의 합법정과 정당성을 스스로 생산하며 그 과정에서 배제의 시스템(정상과 비정상)을 작동시킨다. 곧 법규범은 법의 외부를 지칭해야하는 모순점을 안고서야 비로소 법으로써 작동한다. 이러한 권력의 효과는 그것의 기원과 원리를 은폐하여 특수한 합리성을 보편화 즉, 자연화한다. 특정 담론에서 가능한 전제를 근본전제로 설정함으로써 생성된 주체, 구성된 본질, 젠더의 불확실성을 은폐한다. 자연에 대한 해석 자체가 바로 권력인 것이다. 무엇을 ‘자연적’ 혹은 ‘정상적’이라고 언표하는 담론 자체가 바로 권력 작용이다. 그렇기에 여성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재현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충분하지 않다. 보다 더 나아가 “페미니즘 주체인 ‘여성들’의 범주가 해방을 추구하는 바로 그 권력체계에 의해 어떻게 생산되고 구속받는지도 알아야 한다.”

법규범과 법의 외부
“법규범은 스스로의 외부, 즉 그 위반 사례를 ‘만약……이라면’이라는 표현으로 ‘포함’함으로써 스스로를 적용시킨다. 법규범은 어떤 사실적 영역에서 일어난 사태를 다루는 규칙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때 발생한 사태를 언제나 규범의 바깥으로, 즉 규칙으로부터 베재함으로써 내부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김항, 『종말론 사무소』, 문학과지성사, 230쪽)


권력체계가 주체(범주)를 생산하는 것 이외에 ‘여성들’이라는 보편 범주는 정치적 문제가 있다. 이 복수형의 (대표/대의)이미지는 “표현하고 재현하려는 사람들의 합의”를 상정하기에 정치적 문제를 동반한다. 즉 ‘여성들’이라는 견고한 기표는 구체적인 차이를 가린다. 과연 ‘여성들’이라는 기표가 (이러한 구분이 용납된다면) 제1세계와 제3세계,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지향성 등의 차이를 표현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앞서 논의에 따라 젠더가 이미 구성된 것, 간술화적인 성격을 띤다고 한다면 ‘여성들’이라는 보편 범주는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술화
 이 개념은 “서술구조”와 관련되어 있다. “서술적이란 형용사는 비단 어떤 사건의 진술 내지 이야기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설명의 의미까지도 포괄한다.”(페터 지마, 『이데올로기와 이론』, 문학과지성사, 182쪽)


젠더는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늘 가변적이고 모순적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이며, 담론적으로 성립된 정체성의 인종적, 계급적, 민족적, 지역적 양상들과 부단히 마주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젠더’를 정치적, 문화적 접점에서 분리해내기란 불가능하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의 ‘여성’주체를 비판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여성의 억압이 보편적 체제나 가부장제, 혹은 남성 지배 구조에서나 발견되는 어떤 유일한 형태라는 생각 말이다. 최근 보편적 가부장제라는 개념은 젠더 억압이 존재하는 실제의 문화적 상황에서 젠더 억압의 행위를 설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판의 요점은  ‘보편적인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지배구조를 간소화 시킨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와도 연결이 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이론화하는 것은 서구적 억압 개념을 높이 지지하기 위해 비서구적 문화를 식민화 하고 착취”한다는 비판에 봉착한다. 이는 각 문화와 지역 간의 복잡한 양상을 도외시하고 서구의 억압개념을 제3세계나 동양에 직접적으로 접목하면서 발생되는 문제이다. 이러한 서구중심주의는 페미니즘이 비판하려고 하는 로고스 중심주의와도 연결이 되는 바, 일종의 자가당착으로 몰린다. 또한 보편적 억압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여성의 공통 경험을 “피지배 경험”으로 상정하는 것도 문제의 소지가 된다. 사실 이러한 버틀러의 비판은 논쟁의 여지가 다분하다고 생각된다.     


온갖 다른 방식으로 여성적인 것의 ‘특성’을 다시 한번 완전히 맥락에서 분리하여, 계급, 인종, 민족성 및 다른 권력 관계들의 축들과 분석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때 이 계급, 인종, 민족성, 권력관계의 축은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단일한 정체성 개념은 잘못된 명명으로 만들어버린다.     


버틀러는 안정된 페미니즘의 주체라는 어설픈 범주를 비판하며, 설령 이 범주가 해방적 목적으로 검토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구성은 강압적인 규제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녀가 재현의 정치학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권력의 바깥에 위치한 지위, 즉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관행을 꼬집으려는 것이 계보학적 접근의 요지이다. “당대의 사법구조가 생산하고 당연시하고 영원한 것으로 만든 정체성에 대한 비판 말이다.”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이러한 논쟁은 재현의 정치학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고함으로써 새로운 정치학을 형성을 목표로 한다. 버틀러는 관행적으로 전개되었던 이러한 페미니즘 ‘주체’라는 전략적 개념이 오히려 페미니즘의 목표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젠더 관계를 규제하고 물화(reification)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물화야말로 페미니즘의 목적과 배치되는 것은 아닐까?(……) 안정된 젠더 개념이 더 이상 페미니즘 정치성의 근본이 되는 전제를 입증ㅎ알 수 없다면, 아마 젠더와 정체성의 물화에 대항하는 새로운 종류의 페미니즘 정치학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법적 주체로 간주되는 것을 생산하고 또 은폐하는 정치적 작용을 추적하는 일은 바로 여성 범주의 페미니즘 계보학이 맡아야 할 과제이다.     



Ⅲ-2 섹스/젠더/욕망의 강제적 질서

계보학적 접근에 따라 섹스/젠더라는 두 양상을 살펴본다면 이러한 자연스러운 구분법에 의문이 생긴다. 결국 그것들은 자연적인 것인가? 버틀러의 논의에 따르면 권력과 담론의 외부는 없다. 섹스와 젠더에 대한 인식은 특정한 담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푸코가 물음(광기에는 역사가 있을까?)을 던졌던 것처럼 버틀러는 이렇게 묻는다. 섹스에는 역사가 있는가? 첨예한 논쟁의 장으로써의 섹스는 어쩌면 이미 젠더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버틀러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어 한다. “섹스와 전제는 전혀 구별 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단순히 젠더를 ‘정해진 섹스’에 대한 문화적 해석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젠더는 주체를 생산하는 권력처럼 섹스를 생산하는 장치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즉 기존의 젠더 개념은 ‘주어진 자연’이나 ‘자연적 섹스’를 담론 이전이나 문화에 앞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표면 생산하며 설정하게 하는 담론적/문화적 수단이다. “이렇게 섹스를 담론 이전의 것으로 생산하는 것은, 젠더라 지칭되는 문화적 구성장치의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담론 이전의 섹스는 결국 권력관계가 자신의 조건을 은폐함으로써 생산되는 하나의 결과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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