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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plexArea Oct 16. 2017

[독서노트] <젠더 트러블> 발제(2)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발제: 98-149쪽까지

<젠더 트러블> 발제(2)

-98쪽에서 149쪽까지     


. 1부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3-6)   

  

Ⅰ-3장 젠더-현대 논쟁에서 돌고 도는 유적

젠더는 소여된 것, 직접 주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젠더입니까?”라는 질문 그 사람의 본질적 요소로써의 젠더개념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섹스의 문화적 해석”이라는 전통적 젠더 해석은 논쟁의 지점이 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앞선 발제에서 보았듯이 젠더 자체가 트러블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논쟁사는 젠더를 둘러싼 ‘해석의지’의 역사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젠더를 구성적 관점에서 간략하게 검토해보았다. 그런데 이 ‘구성’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버틀러는 3장에서 대략 두 가지의 큰 질문과 그 질문이 파생시키는 문제점을 진전시켜 하나의 저항가능성을 모색한다. 우선 사회결정주의(구조주의)적 구성을 검토해보자. 단 몇 줄의 짧은 문장 속에 버틀러의 문제의식과 그녀가 참고하고 있는 후기구조주의의 고민이 고스란히 있다.     


그 구성성이 행위주체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사회적 결정주의의 어떤 형태를 의미하는가? ‘구성’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은 특정한 법이 보편적 성적 차이의 축을 따라 젠더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것인가? 젠더 구성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구성에 앞선 구성자인 인간을 가정하지 않는 구성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젠더 트러블』, 98쪽)     


위의 인용문을 검토해보자. 구조주의에서 주체는 일종의 상징적 대행자로서 주체의 자율적 선택이란 일종의 환상이다. 그렇기에 구조주의 내부에서는 인간 주체는 사회결정적이고, 주체는 구조의 외부로 나갈 수 없기에 사회 변혁의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의 요소들, 기호(상징)는 중립적일까? 그 전에 이미 기호는 담론화/권력화/맥락화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은 후술에서 버틀러의 계보학적 접근(어디서, 어떻게, 누가)으로 사회결정론을 비판한다.

바로 첫 번째 질문이 구조주의에 대한 계보학적 비판이었다면 두 번째 핵심 지점은 바로 ‘몸’이다. 우리가 구성의 결정론적 맥락을 받아들인다면, 몸은 문화의 법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담지체로 전락한다. 그러나 몸은 언제나 문제적·상황적이다. 이 장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지만 몸의 정치학은 몸을 문제적 장소로 다룬다. ‘과연 몸은 수동적 수용체인 것일까? 몸이란 항시 밖-(살)갗을 사유하는 것은 아닐까?’ 밖을 사유하는 ‘몸’이란 주제로 이 발제에서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하다(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는 몸의 외부성을 성찰 할 수 있는 재미있는 텍스트 중 하나이다). 버틀러에게도 몸은 아주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버틀러가 구성적 결정론을 비판함으로써 열고자하는 지점은 ‘몸’을 저항의 요충지로 만들기 위함도 있다.

우선, 다시 돌아가서 구성의 결정론적 맥락을 다시 검토해보자. 버틀러는 보부아르를 인용하며 젠더 비판의 초석을 마련하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보부아르의 주장에서 여성은 언제나 문화적 강제 상황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부아르의 설명 속에는 여성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반드시 여자라는 확언은 어디에도 없다. 더불어 보부아르가 “몸이 하나의 상황”이라고 주장한 것을 참고한다면 “문화적 의미로 해석되지 않은 몸”은 어디에도 없다. 문화적 해석 이전의 순수한 몸은 이론의 디딤돌이 될 수 없다. 이미 앞선 발제에서도 검토하였지만 몸은 이미 맥락화 되어 있다.     


몸에 대하 전유나 해석의지는 그 자체로 문화적 의미를 결정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 ‘몸’도 그 자체로 하나의 구성물이다. 몸은 그 몸의 젠더 표식에 선행하는 어떤 의미 있는 실체를 갖는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몸은 어느 만큼 젠더 표식 안에서, 젠더 표식을 통해서 존재가 도는 것인가? 어찌해서 우리는 더 이상 몸을, 분명하게 정신적인 의지의 역량을 끌어 올리기를 기다리는 어떤 수동적 매개나 도구로 재고하지 않게 된 것인가?(『젠더 트러블』, 100쪽)     


섹스와 젠더에 대한 판단은 담론적 기능한다. 이 담론적 기능은 특정한 전제를 통해서만 분석을 보증할 수밖에 없다. 버틀러는 끊임없이 전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를 요구한다. 즉 우리 사고의 암묵적 전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을 생산한 권력관계를 묻는다. 보편적 합리성의 언어를 비판함으로써 절대적 합리성을 보증하는 언어가 존재하는지를 반문한다. 그리고 물음들은 이렇게 전개해 나간다. 권력의 역장에서 벗어난 보편적 사회적 술어가 존재할까? 언어는 언어의 외부로 나갈 수 있을까? “따라서 규제라는 것도 언어가 상상 가능한 젠더 영역으로 구성한 것 안에서”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몸과 젠더의 관계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젠더가 개별적 속성아 아니라 ‘관계’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론가도 있으며 보부아르의 견해를 따라 여성적 젠더만 표시될 뿐 남성 젠더는 보편적 인간(보편적 인성/주체)과 혼용되어 여성만이 성의 관점(성애화)에서 규정된다고 보는 페미니즘 이론가도 있다. 이러한 성차·젠더·규범·이성애에 대한 논의는 여성 정체성 담론 내부에서 어떤 역설을 구성하게 된다. 이리가레는 보부아르와 반대로 “남근로고스 중심적 언어 안에서 여성들은 재현 불가능을 구성한다”라고 주장한다. 보부아르가 타자화된 여성을 지적하며 여성을 주체의 지위로 올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때 이리가레는 이 주체-객체 변증법 자체가 이미 남근로고스적 언어라고 비판한다. 이리가레에 있어서는 남근주의에서 벗어나는 고유한 여성적 차원이 중요하다. 그녀는 프로이트-라캉주의를 비판하며 “일의적 의미화에 기초한 언어 안에서 여성의 성은 규정 불가능성이나 지칭 불가능성”구성한다.      


주체인 남성과 의미의 대상인 타자라는 사르트르의 틀 안에서 여성은 잘못 재현되었을 뿐 아니라, 그런 의미화의 오류는 재현의 전체 구조까지도 타당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가 아닌 성은 패권적 서구의 재현에 대한 비판의 출발점뿐 아니라, 바로 그 주체라는 개념을 구축하는 ‘본질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젠더 트러블』, 102-103쪽)     


버틀러는 본질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면서 분쇄하고자 하는 목표를 확고히 한다. 인본주의적 개념, 즉 휴머니즘 비판을 가하게 된다. 사르트르나 보부아르 같은 모더니스트들의 이론에 저변에는 주체개념이 확고히 있다. 이는 20세기 초반에 득세했던 사상(현상학, 실존주의, 맑스주의)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이론적 전제이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를 받아들인 버틀러의 입장에서 이 주체개념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사유가 필시 인간학의 근절을 위해 기울일 최초의 노력은 아마 니체의 경험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헌학적 비판을 통해, 어떤 형태의 생물학주의를 통해 니체는 인간과 신이 서로에게 속하고 신의 죽음이 인간의 사라짐과 같은 뜻을 지니고 약속된 초인의 출현이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죽음을 온전히 의미하는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오늘날 인간의 사라짐에 의해 남겨진 공백 이외의 다른 곳에서 사유하는 것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 실제로 이 공백을 결여를 야기하지 않고, 채워져야 할 빈틈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 공백은 사유하기가 마침내 다시 가능한 공간의 전개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다. (미셸 푸코,『말과사물』, 468쪽)     


당시 주류 사상의 대전제였던 인간의 죽음은 철학의 종말이 아니었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탈근대의 지평을 열었을 때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푸코 또한 인간의 빈자리가 단순한 결여의 지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사유는 (본질적/보편적)인간의 공백을 사유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버틀러가 이러한 포스트 담론을 이어받아 보편적 젠더, 보편적 여성, 코기토를 비판하고자 한다. “인본주의적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는 젠더를 그 사람이라고 불리는, 본래 젠도화되기 이전의 본질이나 ‘핵’(……)그러면서 합리성이나 도덕적 배려, 언어 같은 보편적 능력을 의미할 것”을 버틀러가 비판할 적에 이 주체는 푸코가 후술에서 비판하고 있는 칸트적 주체와 같다.

이리가레의 비판의 목적은 바로 푸코의 선언(인간의 죽음)과 함께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보부아르의 기획과 달리 이리가레의 비판의 핵심은 바로 주체-객체라는 전통적 인식론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이론가의 논쟁점은 젠더 불균형의 상황 속에서 주체와 젠더의 위치와 의미를 문제 삼는 것이다(젠더를 둘러싼 해석의지). 그러나 이리가레 또한 본질주의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기억하자.

하지만 보부아르의 도식이 남성주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젠더는 오직 여성만이 존재한다고 하였을 때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남성 인식론 주체의 비체현” 자체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다. 남성주체는 추상적 보편주체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표식 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여성만이 여성적 영역에 투사되어, 결과적으로 몸을 여성적인 것으로 명명하게 된다. 즉, 성애화된 몸은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사회적 표식인 셈이다. 그러나 보부아르가 몸을 단순히 수용적 매개로 이해하는 이상 데카르트 식의 이분법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구분법을 유지하는 것은 이리가레가 비판했던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징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Ⅰ-4장 이분법적인 것과 일의적인 것 이론화하기, 그리고 그 너머

남성적 의미경제를 비판하는 이리가레의 이론은 점진하는 세계화의 영향으로 그 영향력이 약화된다. 이리가레가 분명 동일성(로고스) 논리들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녀의 칼끝에 위치시키는 남근로고스적 의미경제는 획일적일까? 역사 문화적 맥락 배열을 횡단하는 단일한 남성의미화 경제를 규명할 수 있을까?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라는 개념아래 차이들을 전유하는 것은 “그 기호 아래 식민화시키면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자기 증식 제스처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적을 단일한 형태로 규명하려는 노력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 대신 억압자의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는 하나의 역담론이 될 수도 있다. 역담론에 대한 고찰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논쟁지점에서도 유의미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 전술이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의 맥락에서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식민화하려는 제스처가 근원적이거나 불가피하게 남성적인 것만은 아님을 시사한다.(『젠더 트러블』, 110쪽)     


또한 보편성의 주장은 공유된 인식론적 관점이나 그것으로 표명된 억압구조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리가레의 전략 중 하나인 ‘여성적 글쓰기’는 이러한 초문화적인 보편적 구조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세계화된 태도는 앞선 발제에서 비판적으로 다뤘다.

대화에는 고통스러운 과정은 따라오기 마련인데 파편화, 분열, 단절, 분산의 수용이라는 민주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한 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 화자에게는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다른 화자에게는 전혀 반대의 이해가 일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대화 가능성의 조건과 한계를 만드는 권력관계”에 대한 심문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기에 통일성을 전제하는 운동의 결속 문제는 끊임없이 내부적 비판에 의한 파열이 일어난다. 간주간적인 대화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자유주의 모델을 기초하고 있다. 이 자유주의 모델은 앞서 검토했던 인간의 죽음을 미처 통보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보편적 이성과 능력, 동등한 권력 위치를 상정한다. 이런 측면에서 하버마스의 간주간적 대화의 신뢰는 페터 지마가 비판했던 것과 같이 간술화적 차이를 보지 못한 결과이다.           



Ⅰ-5장 정체성, 성, 그리고 본질의 형이상학

기존의 사회학적 논의나 철학적 담론에서 정체성은 어떤 고정된 특질 혹은 내적 자질, 자기 동일성(연속성)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있듯이 버틀러는 무엇이 자기 동일성이나 연속성을 확립시키는지 묻는다. 이러한 계보학적 방법은 사람의 일관성과 연속성은 사람됨의 논리적이거나 분석적 특질이 아님을 밝힌다. 비일관적, 불연속적 젠더 존재의 등장은 기존의 견고한 개념을 흔들어 놓는다. “젠더 존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으로 정의되는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있는 젠더 규범을 따르는 데 실패”한다. 그것은 곧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인식 가능성의 규범들의 자기 동일적 구조를 교란 시킨다. 트러블적 젠더 존재의 등장은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프랑스 페미니즘이론과 후기구조주의 이론의 스펙트럼에서는 여러 권력관계들이 섹스의 정체성을 생산한 것으로 간주된다. 남성주체가 타자(여성)를 재생산하여 그 안에서 자신을 발전시켜 하나의 성, 즉 남성적 성만이 존재한다는 이리가레의 입장, 성차에 대한 구별 없이 섹슈얼리티의 규제적 장치가 성의 범주를 생산한다는 푸코의 입장도 있다. 그리고 강제적 이성애 상황에서 성의 범주는 언제나 여성적이라는 위티그의 주장도 고려해볼 수 있다. 성차에 관한 차이에서 이리가레와 푸코가 구분되고 위티그는 이 두 사람과 다른 지점에서 구분할 수 있다. 위티그는 여전히 ‘인지 주체’를 옹호하기에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본질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 같지는 않다. 위티그에게 있어서 실존적인 선택은 행위주체를 부활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리가레와 푸코에게서는 언어의 문제는 인식론(구조)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언어를 구조의 문제에서 검토하는 것이 아닌 선행된 주체가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상부구조)로써 고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젠더가 하나의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법을 문제제기 해볼 수 있다. 여성‘이다’라거나 이성애자‘이다’ 라는 다소 명백해 보이는 문장에서 젠더에 대한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의 징후가 보인다. “어떤 사람은 어떤 젠더이다”라는 견론은 젠더 개념이 이미 정치 맥락 하에서 작동한다. 즉 나는 어떤 젠더‘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 사람의 생물학적 성, 심리적 자아감, 심리적 자아의 다양한 표현 방법, 성적 욕망의 양태 등 그 사람의 내적 속성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들이 연역적으로 따라 나온다. 이런 젠더와 섹스의 혼용은 체현된 자아의 통일 원리로 사용된다.

푸코의 작업에서 성의 범주는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특정한 섹슈얼리티(성 장치)를 통해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효과로써 구성된 ‘섹스’는 성적 경험 및 행동 그리고 욕망의 ‘원인’으로 뒤집어 진다. 이렇게 결과가 원인으로 가정됨으로써 권력장치의 정치적 목적은 은폐된다.      


푸코의 계보학적 탐구는 겉보기엔 ‘원인’ 같아 보이는 것이 ‘결과’임을 폭로한다. 또한 분명한 성의 범주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모든 담론적 설명 안의 근본적이고 인과론적 작용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원인’같아 보이는 것이 실은 성적 경험을 규제하고자 하는 당대의 섹슈얼리티 체제의 생산물임을 폭로한다. (『젠더 트러블』, 110쪽)     


푸코의 계보학적 작업은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에 대한 서술에서 그 명확한 이미지를 얻게 된다. 에르퀼린은 젠더 이분법 안에서 범주화될 수 없다. 그/녀는 기존의 섹스/젠더/욕망(섹슈얼리티)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젠더 정체성을 구성하는 언어적 관습은 에르퀼린에게서 그 경계가 드러난다. 에르퀼린은 “하나의 정체성이 아니라, 성적으로 하나인 정체성의 불가능성”이다. 푸코는 이러한 경계지대를 에셔고양이(『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흥미로운 형상을 통해 전달한다


푸코는 에르퀼린의 경험을 고양이도 없는데 빙글대는 웃음만 떠도는 쾌락의 세계라고 상상한다. 여기서 미소, 행복, 쾌락, 그리고 욕망은 단단히 결부된 안정된 본질이 없는 특성으로 그려진다. 이것들은 자유롭게 떠도는 속성이라서, 본질화 또는 위계화하려는 명사(res extensa)와 형용사(본질적인거나 우연적인 속성)의 문법을 통해서 파악할 수 없는 젠더 경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젠더 트러블』, 129쪽).     


엘리스의 세계는 고정된 의미(말장난), 고정된 정체성(어제의 앨리스와 오늘의 앨리스), 본질적이라고 일컫는 모든 것들이 무너진 세계이다. 문화적으로 규제된 질서와 위계원칙은 규제적 허구라고 폭로하는 푸코의 계보학적 비판은 우연적인 존재론을 주장한다. 본질이 속성을 규제함으로써 만들어진 일관성에 불과하다면, 본질은 인위적인 ‘효과’이며 애초에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본질/속성 이분법은 담론 안에서 젠더는 수행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기에 젠더는 명사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족하다. 이것은 속성조차도 아니다. 수정된 본질적 정체성을 소급적으로 확대 적용하겠다는 주장은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담론 안에서 주체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구성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시도했던 다음의 주장은―행위, 수행, 과정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의미는 표면에 있다라는 루이스 캐럴/들뢰즈를 연상시킨다. 젠더의 표현물 뒤에는 어떠한 젠더 정체성도 없으며, 오히려 그 표현물 때문에 정체성은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루이스 캐럴 작품 속의 사라지는 고양이의 웃음처럼 말이다.      



Ⅰ-6장 언어, 권력, 그리고 위치 변경의 전략     

행위주체를 폐기는 단순히 이론적 문제가 아니다. 주체가 없다면 사회 지배관계를 변화시킬 잠재력은 어디서 발원하는 것인가. 행위주체를 둘러싼 논쟁에서 위티그는 본질형이상학을 반박하는 것 같으나 여전히 휴머니즘적 주체를 전제하고 있다. 위티그에게 있어서 언어는 수단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리가레 같은 경우 남성경제적 언어구조, 즉 여성적인 것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이 젠더 표식에서 유일하게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언어에 대한 위티그와 이리가레의 이해 차이는 꽤나 근본적이다. 위트그의 입장에서 ‘여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이리가레의 주장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분법을 재강화하고, 여성성을 신화화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위티그에게 여성적 글쓰기란 없다.

위티그는 남녀 동성애가 섹스의 범주를 전복하거나 확산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쌓아놓은 성기 중심으로 조직된 섹슈얼리티에 대한 비판으로, 성의 재생상적 경제의 바깥으로 나가는 ‘쾌락’을 주목한다. 이것이 바로 성애적 분산과 성기 중심론 사이의 대립지점이다. 프로이트는 『성욕 이론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발달개념을 도입해 유아성욕을 설명한다. 그의 관점에서 아이의 성욕은 적고 산포된 성욕(부분-충동)에서 성기 중심의 성욕성으로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것이다. 이 발달학 상의 우월은 그의 도착증 설명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동성애를 성기 중심의 발달기준을 달성하지 못한 일종의 ‘성 대상 도착자’라고 분류한다. 이곳이 위티그가 전복을 시도하려는 지점인데, 미발달 성욕의 특성들을 지닌 동성애자는 산포된 성욕을 규제화(안정화)에 맞서 ‘성기기-이후의 정치학’을 채택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버틀러가 문제제기 하는 것은 바로 행위의 원인으로써의 ‘주체’이다. 그러나 위티그의 도식은 여전히 이분법적이고 우리가 이성애 담론에서 제기판 물음을 그대로 돌려줄 수 있다. 위티그의 뒤집기는 선행관계를 바꾸어놓긴 하였으나 여전히 같은 구조를 차용하기 있기에, 여전히 목적론적 비판에 직면한다. 뒤집힌 발달이론을 전제하기에 그녀의 이론에 있어서 다형적 도착성은 인간 섹슈얼리티의 목적인(tleos)가 된다.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위티그는 젠더 표식이 발생하는 언어의 의미와 기능을 덜 이론화 하였거나 평가절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성차에 대한 페미니즘의 접근은 그것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살펴보지 않는다. 위티그가 놓치고 있는 지점을 이리가레가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녀는 여성성은 결코 주체의 표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여성성을 남근적 상징계의 그물망에 뚫린 구멍(결핍)으로 보고, 재현불가능한 부재로 이론화 함으로써 남근중심주의 헤게모니를 비판하고 있다. 이리가레의 후기 라캉에 대한 독해는 ‘억압된 것의 재등장’이라는 트라우마적 개념을 정체성 이론에 접목시킨다.     


무의식은 억압된 섹슈얼리티의 장소로서 바로 그 일관된 주체의 불가능성으로 주체 담론에 재등장한다.(…) 즉 억압된 것이 우연히 재등장하면서, 이런 일관성의 팔연은 ‘정체성’이 구성된 것임은 물론, 정체성을 구성하는 금기가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드러낸다(『젠더 트러블』, 138-139쪽).     


언어를 상부구조로 보는 유물론적 입장(위티그)과 후기 라캉(이리가레)의 입장 차이는 법‘이전’ 혹은 ‘외부’에 대한 논쟁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구분법은 단선적인 면이 있다. 버틀러는 여기서 푸코의 권력론을 참조하여 다른 길을 모색한다. 푸코는 섹슈얼리티와 권력이 동시적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버틀러가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수행성은 법의 ‘이전’ 혹은 ‘이후’ 모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푸코의 권력론에서 그 개념을 확인해볼 수 있다.

위티그와 이리가레는 관점에서는 동시적 사유가 엉렵다. 그러나 푸코의 권력론―푸코는 권력의 두 가지 양태(억압적 / 사법적)를 강력하게 비판한다―은 법보다는 권력이 어떻게 변별적 관계생성과 생산 작용(주체) 모두를 포괄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권력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섹슈얼리티는 단순한 법의 반영이 아니다. 권력이 억압의 기제가 아닌, 생산의 장치로써 작동함을 감안한다면, 이 생산된 섹슈얼리티는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의 경계를 사실상 확장시키는 주체들의 가능성”을 작동시킨다고 볼 수 있다.

푸코를 페미니즘/레즈비언 방식으로 전유하려는 페미니스트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유토피아적 섹슈얼리티(위티그의 레즈비언 섹슈얼리티) 개념은 권력관계가 계속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 실패한다. 성차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푸코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비판도 이와 비슷하다. 남근적 섹슈얼리티와 구분되는 여성적 쾌락이 있다는 개념 또한 같은 비판을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문제는 아래와 같다고 생각한다.    

 

섹슈얼리티를 자신만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부분적으로 남근 경제의 관점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들은, 이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남성과 동일시’ 되거나 ‘계몽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잠정적으로 삭제되고 만다(『젠더 트러블』, 142쪽).   

  

이러한 논변은 다시금 권위즤적 운동으로 귀결되는 전형적인 근대적 담론의 쌍생아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사회를 분석한 글은 「말과활12 이미와 아직 사이-퀴어」를 참고할 수 있겠다.

「오늘 왜 페미니즘은 ‘혐오’와 접속했는가」, 『말과활 12』, 107쪽
저자는 여성혐오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근대 ‘정상가족’을 분석한다. 이는 정상/비정상 범주가 작동하는 지점으로 혐오현상과 페미니즘 내에서의 혐오 키워드 채택이 어쩌면 그들이 페미니즘이 지나온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반문한다. 즉, 정상/비정상 담론을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지 못한 채, 마치 사회가 합리화되면 여성들이 해방되고 평등해질 것이라고 믿어온 시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한다.

      

해체를 거듭하는 버틀러의 작업들은 결코 섹슈얼리티를 남성론적인 동실시의 기호로 환원하지 않는다. 분명  권력 이전, 외부, 너머에 있는 섹슈얼리티를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정치적으로 의미없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버틀러는 위티그, 이리가레, 푸코를 참조함으로써 법의 위치변경 혹은 반복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녀의 주장대로 정체성은 이미 젠더화 되어 있기에―언어/권력의 외부는 없기에―즉, 우리의  섹슈얼리티는 근본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거부할 수 없다면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결국 구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행하는지가’문제의 관건이다. 아래의 두 가지 질문을 보자.     


법을 강화시키지 않는 반복의 형식이 과연 존재하는가? 젠더화된 삶을 비해나는, 다양하게 발현, 때로는 수렴되는 문화적 인식 가능성 가운덴 어떤 젠더 배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젠더 트러블』, 144쪽).     

섹슈얼리티 내에 권력 역학이 존재한다고 해서 부치와 팸의 경우가 본래의 이성애적 정체성을 그대로 (무비판적으로)재현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게이 섹슈얼리티나 게이 정체성이 이생애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성급하다. 섹슈얼리티 맥락에서 이성애를 반복하는 것은 구성물을 반복하는 것이고 곧 젠더 범줄르 탈자연화하는 전략적 제스처이다. 만약 모든 것이 만들어진 위상임이 분명히 드러난다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관계는 복사본과 원본의 관계가 아닌 복사본과 복사본의 관계이게 된다. 이것이 버틀러가 주장하는 패러디의 정치적 힘의 근원이다. 이렇듯 반복이 정체성의 문화적 생산의 기제로서 작동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전복적 반복이 정체성 자체의 규제적 관행을 문제 삼을 것인가(『젠더 트러블』, 146쪽)?     

사실 이 질문은 계보학적 기획이 드러내고자 하는 부분이다. 계보학은 젠더가 단순히 구성되었기에, 그것의 허구성과 인위성만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목표는 이 허구성을 폭로함으로써 ‘실재인 것’과 ‘진정한 것’이라는 본질주의적 구조를 밑에서부터 해체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젠더가 환영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애초에 원본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사실이다. 보부아르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유명한 테제는 이런 맥락에서 부분적으로 옳다. 여성 자체가 구성 중이라는 말은, 구성 중에 있는 것에 담론적 실천이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고 재의미화할 수 있음을 뜻한다. 보부아르는 테제는 과정 중에 있다 라는 측면에서 옳았고, 틀린 점이 있다면 여성이 된다는 것은 종국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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