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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plexArea Oct 30. 2017

[독서노트]<젠더 트러블> 발제(3)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발제: 153-169쪽까지

2부 금지정신분석학그리고 이성애적 모태의 생산(1장)


가끔 페미니즘 이론은 그 기원에 대한 물음에서, 여성 억압의 역사 보증물로 작동하는 가부장제 '이전'에 대한 충동에 휩싸인다. 가부장제 이전에 문화가 존재했는지, 그 문화가 구조적으로 모권적이거나 모계적인었는지, 또한 가부장제는 시작점이 있으니 끝도 있게 마련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지 등의 논쟁들이 줄곧 제기되어 왔다.

요한 야콥 바흐오펜(『모권』의 저자)의 논쟁적 저서는 비단 엥겔스에게만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니다. 엥겔스가 사유재산을 비판하려는 가운데 바흐오펜의 모권론을 가져온 사실은 페미니즘 이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 아래에서 모권의 신화적 이미지에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전개할 수 았다.    

 

가부장제 이전의 문화 상황으로 되돌아간 것은 가부장제의 자기 물화를 폭로하려는 의도였지만, 그런 가부장제적 기획 자체가 또다른 종류의 물화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젠더 트러블』, 153쪽)     


이러한 비판적 추동력은 가부장제의 필연성을 역사적 우연성으로, 가부장제의 필연성은 역사적이고 우연적 현상에 대한 물화적 태도의 결과라고 밝힌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버틀러의 논의를 참고한다면 어쩌면 자연스럽게 던져질 질문이 있다. 

가부장적 이전의 문화, 즉 수평적 사회로서 원시 공산주의 사회의 신화적 모태가 되는 그러한 사회 말이다. 그러나 버틀러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기획의 의도가 어떻든 이러한 접근로는 또하나의 신화적 모델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와 같은 이론적 토대는 페미니즘 내에서도 비판을 제기했다. 

초문화적 개념으로 ‘가부장제’는 지난 발제에서도 보았듯이 문화적 맥락에 놓인 젠더 불균형을 축소하는 보편적 개념일 될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가 가부장제를 검토할 때 가장 경계시해야 하는 것은 ‘식문화된 인식론’인 것이다. 물화된 주장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여성 스스로의 경험 또한 물화되어 가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김항, 『종말론 사무소』 8장 참고: 신화와 서사에 대한 벤야민의 정치학적 비판)     


‘이전의 정치학’은 순수하고 본래의 여성성을 겨냥하기에, 이는 오늘날 젠더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당대의 요구에 맞춰 생각해보면 편합한 방식이다. 본래의 여성성을 구출하기 위해 특정 신화를 보수화하는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보았듯이 이러한 사고는 페미니즘 내부의 배타적 실천을 만들어내며 또하나의 억압기제로 작동한다. 

이전의 정치학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에 이론적 빚을 지고 있다.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섹스/젠더는 날것과 익힌 것이라는 이분법을 전제로 한다. 지난 발제에서 계속해서 다뤘듯이 젠더를 자연에 대한 문화적 해석으로만 파악한다면, 즉 이러한 관점은 무엇보다 섹스를 ‘법 이전’혹은 ‘원재료’라는 진공적 담론에 빠지고 만다―오염되지 않는 보편 즉, 순전히 진공 상태의 순수한 보편성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골자, 모든 것이 젠더화 되어 있다는 주장을 다시 한 번 강조해도 반복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강력한 주장은 담론의 외부는 없다는 사실, 섹스 개념마저도―원재료이자 법 이전의 신화적 개념―담론의 구성물인 것이다. 

자연에 코드를 부여하는 이성/정신이 남성적 주체를 상징한다면 수동적인 자연으로 의미화되는 대상은 바로 여성(몸)을 지칭한다. 여성의 몸에 대한 혐오적 발언이나, 물질성과 의미의 배타적 관계는 서구 정치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맥락이다.

※(누스바움, 『혐오에서 인류애로』 참고: 성애화된 여성의 신체가 어떻게 혐오 대상으로 작동하는지. 정신을 대변하는 남성적 주체와 신체(물질)을 대변하는 여성)


바로 이러한 이분법과 위계화된 담론을 은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성, 주어진 것으로서의 성이다. 성 정치학의 자연에 대한 담론적 구성물을 생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구조를 은폐하는 것이다.      


자연을 유일하고 담론 이전에 오는 것으로 가정하는 분석방식은, 주어진 문화적 맥락 안에서 ‘무엇이 자연을 부여받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떤 목적에서인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없다.(『젠더 트러블』, 157-158쪽)     


섹스 개념자체가 정치적으로 논쟁적이고,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이분법의 전제 자체를 비판한다면, 날것이라는 가정은 이미 ‘익힌 것’으로 입증된다. 결국 구조주의의 이분법을 비판함으로써 그 견고한 그물망에 구멍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가부장적 필연성을 비판할 요량으로 채택한 대안적 인식론인 ‘이전의 정치학’과 ‘외부의 정치학’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섹스를 젠더로 변하게 하는 매커니즘을 서술한다는 것은 모든 필연성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가정된 것, 그 위계적·억압적 문화보편성을 세우는 것과 같다. 버틀러는 무차별적 보편성과 억압적 보편성에 끊임없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이것에 권력론 적으로 접근한다. 조만간 기회가 되면 보편성과 관련 되어서 다른 텍스트를 참고해보고 싶다(주디스 버틀러 외,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도서출판b)     



제2부 1장 구조주의의 비판적 교환

레비-스트로스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 프랑스 역시나 보편성의 문제이다. 물론 레비-스트로스가 서구의 보편성을 일면적(철학적 독단론)으로 깨뜨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기호론 역시 어떤 보편적 구조물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실상 그는 자신이 떠나고자 했던 탈문맥화된 철학구조로 자신의 분석”을 되돌린다. 레비-스트로스 저작이 가정하고 있는 보편성에는 수많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버틀러가 이 장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정체성이다. 이리가레의 후기구조주의적 충동은 레비-스트로스의 폐쇄적 상징계의에서의 위치 변경이라는 맥락과 함께 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에서 여성은 ‘교환대상’으로 나타난다.

구조주의는 언어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기호학에서 소쉬르가 일정 부분 언어의 자의적인 면을 제시하고 있지만, 분명 그의 이론 내에서 파롤은 랑그에 종속되어 있다. 결국 언어구조의 총체성 내에서의 자의성, 완전성 내에서의 불완전성이다. 후기구조주의가 시도하는 상징계의 위치변경은 종래의 구조주의가 가지고 있는 폐쇄성을 돌파하는 것이다. 의미의 개방성과 모호성, 끊임 없는 차이적 생성과 (의미의)지연을, 구조주의적 이분법이 강제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가 보여주듯이 이러한 고정은 불가능하다. 이리가레의 입장(후기라캉)에서 레비-스트로스적 남근로고스경제는 표명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전제되는 동시에 부정되는 ‘차연(차이+지연)’의 경제에 근본적으로 의존한다. 즉, 남성적, 가부장적, 부계 계승적 정체성에서 여성은 주체로서 표명되지 않는 하나의 부재·결핍으로 대상화되며 코드화된 여성은 그 자체로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닌, 남성적 주체에 대한 보증물로써 작동한다.      


교환, 즉 결과적으로 족외혼 법칙은 단순히 상품들 간의 교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환, 즉 결과적으로 교환을 표시하는 족외혼 법칙은 그 자체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남성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수단을 제공한다.(『젠더 트러블』, 164쪽)     


위의 레비-스트로스의 발언은 두 가지 차원을 설명해주고 있다. 하나는 앞서 보았듯이 대상화된 여성이 어떻게 (남성적)동성적 경제(동성사회적 욕망)를 강화시키는지,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근친상간 금기가 어떻게 이성애적 매커니즘을 강화시키는지 묻는다. 남성들 사이에 설정된 교환관계(상징교환)는 근본적으로 남녀간의 비상호관계를 조건으로 한다. 상호관계는 두 주체를 전제하는데 이 구조에서는 여성은 단지 교환대상이기에 남녀관계는 비상호관계이다. 결국 주체가 아닌 여성 간의 관계 또한 비관계의 관계이다. 앞뒤가 꽉막힌 이러한 구조는 레비-스트로스의 말에서도 드러나는데, 다음의 악명 높은 구절과 그에 대해 비판하는 버틀러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레비-스트로스는 “상징적 사고의 출현으로 인해 이는 여성들에게 언어처럼 교환 대상이 될 것을 요구했음이 틀림없다”라는 악명 높은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레비-스트로스가 투명한 관찰자의 회고적 태도에서 오는 미리 전제된 보편적 문화구조에서 어떤 필연성을 끌어왔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은 수행문으로 작동할 뿐인 하나의 추론으로 보인다. 레비-스트로스가 상징계가 등장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필연적인 역사를 추측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명령문이 된다.(『젠더 트러블』, 165쪽)     


우리가 이리가레(후기 라캉)의 논의에 따라 상징계에서 배제된 영역이 존재하고, 그 배제된 영역이 상징계를 강화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징계의 패권을 폭로한다면, 마치 보편적 문화구조인 것인양 쌓은 레비-스트로스의 대전제가 역사적 우연성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여성이라는 부재(결핍)는 하나의 위치변경의 가능성으로써 작동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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