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신념의 게으름

두 번의 사기와 잡설

by 신발끈
발리의 맥주는 빈탕이 최고였다.

두 번의 시련을 겪고 침울한 여행기가 될 듯 했지만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음식을 먹으면 결국은 평화가 찾아온다. 사실 "사기"라고 하기에도 귀여운 수준인거다. 택시 기사는 두 배가 넘는 요금을 받았을 뿐이고, 환전소 직원은 삼분의 일의 금액을 속인 것뿐이다. 택시 기사는 나를 무사히 숙소로 데려다주었고, 환전소 직원은 삼분의 이의 금액은 온전하게 내 손에 쥐여주었다. 나의 멍청함에 화가 났지만 나머지 여행을 진행하기에 무리가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이렇게 적당히 배우고 깨우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다.

물론 여파는 있다. 그간 '다들 좋은 사람일 거야'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의 '게으름'일지 모른다. 의심은 찝찝함을 남기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생각하며 잊는 거다. 나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믿으며 지내왔다. 그래야지 나아갈 수 있었다. 나는 '의심'을 회피해 왔고, 그건 나의 방어본능이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내 선택은 옳아.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통해 '사유'를 잃은 인간이 얼마나 악에 가까워지는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복잡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시시비비를 가리며 세상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번거롭지 않는가. 어차피 세상은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흘러가는데. 꼬치꼬치 따져 물으며 세상의 재판관이 되려 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과 자주 다투었다. 나는 장황한 말들로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대부분 정치적인 이야기였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이나 진보 정당 같은 주제. 어느 순간부터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굳이 사람들과 관계에서 생채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너그럽고 포용력 있는 어른이 된 거라 착각했다. 조금씩 숨기고 감추다 보니, 이게 정말 맞는 건지, 내 생각이 무엇인지 희미해졌다. 나는 나를 설명할 말을 잃었다.

100명이 모이면 100개의 진실이 있다고. 어쩌면 진실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적당히 뭉뚱그리며 사는 것이 방법이라고. 나는 사유를 버렸다. 날이 곤두서서 하나하나 따지려는 이들을 만나면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어차피 다 소용없는 짓이야.'

언어가 통하지 않은 국외여행에서는 이런 '퉁치기'가 최대치에 이른다. 어차피 적당한 나누는 대화라는 게 정해져 있다. 어디서 왔어. 발리는 어때. 여기 좋아. 맛있어. 고마워. 알아듣지 못한 무수한 말들은 공중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좋은 여행자를 만났다고 위안을 삼는다.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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