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둘의 겨울. 나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삼 년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고, 마침 코로나로 세상이 얼어붙었다. 불꽃같던 사랑이 허망하게 끝이 났다. 갑작스레 이별을 통보받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파묻혀 세상과 이별하고 싶었다. 사랑이 끝이 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붙잡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슬픔을 꾹꾹 누르며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6개월이 지나갔다. 슬픔이 나인지 내가 슬픔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술에 취한 새벽에는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냥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 순간에도 돈을 벌어야 했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이력서를 넣은 곳에서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청소년을 지원하는 공공기관이었다. 나의 조건으로는 어림도 없는 곳이라 여겼다. 청소년단체와 대안학교에서 활동했던 나는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전에 근무했던 대안학교도 지인의 추천으로 들어간 곳이었다. 열정은 넘쳤지만 사회생활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기에 동료 교사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부끄러운 그곳의 경험이 이력이 되어 서류 전형에 합격한 모양이다. 짧은 기간 동안 필요한 서류를 챙기고 면접을 준비했다. 바리스타 자격증, 성교육 강사 자격증, 교육연수 경험... 쓸 수 있는 모든 자격과 경력을 긁어모아 완성한 이력서가 초라해 보였다. 19개월 계약직이었지만 다니고 싶어졌다.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어졌다. 면접엔 두 명이 참여했는데 어쩌면 내가 붙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합격이었다. 출근까지는 일주일이 남았다. 정신을 차리고 어둠에서 빠져나와 집을 구하고 짐을 싸야 했다. 절망의 한 가운데 있던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모험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회사에선 10여 명이 근무하는 제법 큰 팀으로 발령이 났다. 팀의 계약직은 내가 유일했다. 정직원들은 나와 띠동갑인 젊은 청년들이었다. 세련된 서울말을 구사하는 그들은 명확하고 빨랐다. 입사하고 두어 달은 걸려온 전화를 받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주 작은 일도 혼자 해낼 수 없었다. 문서를 작성하는 것도, 예산을 처리하는 것도, 민원을 응대하는 것도 하나하나 물어가며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oo 선생님, ***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건가요?"
겨우 입을 떼어 물어보면 상대는 크게 한숨을 쉬며 "@@선생님 업무니까 거기 물어보세요."라고 답했는데 나는 정작 @@선생님을 알지 못했다.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일 출근을 해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 근무시간을 채웠다. 6시에 퇴근하여 가까스로 집에 돌아와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는 날이 반복되었다.
계약기간 동안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회사를 나갔다. 끝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었고, 남들의 기대와 관심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젊은 일잘러들 사이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어리숙하며 말귀가 어둡고 일하는 것도 느려터진 나는 1인분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담당해야만 하는 업무들이 있었다. 연말의 사업 보고대회가 내게 주어진 일이었다. 부장은 처음 맡게 된 일이니 어려울 거라며 간단한 기획안을 작성한 후 함께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나는 지독하게 일머리가 없었다. 과거의 보고서를 참고해서 형식을 맞추어야 될 일이었다. '간단하게 초안을 작성하고 편하게 이야기하자'는 말에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10포인트의 글자로 줄줄 쓴 종이를 들고 갔다. 문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기획안을 마주한 부장은 말이 없었다. 그녀 앞에서 나는 사업의 진정성과 기획의 참신함을 이야기했고, 가만히 듣던 부장은 입을 떼어 기획안의 형식을 알려주었다. 글자의 포인트는 14로, 여백은 좌우 10센티, 제목은 눈에 띄게... 당시의 나는 그런 부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먼저'라고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건 문서작성 트레이닝이었을까. 하루 종일 2장짜리 기획안을 고쳐 쓰면 부장은 빨간펜으로 일일이 첨삭하여 돌려주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고 어찌저찌 기획안의 모양이 완성되나 싶으니 본부장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몇 달을 꾹꾹 눌러 작성한 기획안은 다시 붉은 줄이 그어져 돌아왔다. 힘이 빠졌다. 일의 능력은 보고서 작성 기술인가. 나의 노동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그저 시키는 일만 하면 될 일이었다. 잘하고자 하는 마음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무의미의 시간. 나는 조용히 보고를 하고, 조용히 자리에 돌아와, 보고서를 고쳤다. 동료들은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나의 자리는 사무실 구석, 어둠이 깔린 곳. 거기서 나는 그림자처럼 머물러 있었다. 준비하던 행사는 코로나로 결국 취소되었다. 갈팡질팡하던 나의 노동은 조용히 사라졌지만 그게 다행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좌절할 것도 없었다.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다 보니 1년이 지나갔다. 퇴근 후의 나는 여전히 어둠의 세계로 빠져들어 술에 취해 잠을 잤다. 새벽 무렵 잠을 깨면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아득해졌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삶은 여전히 무기력하고, 존재의 이유는 알 길이 없었으나 지각하지 않고 출근을 했다.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탄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회사로 걸어간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는 무의미의 시간을 버텼다.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거창한 목표와 방향 없이 살아가는 자신이 가여웠지만 그렇게도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더라. 동료들과 조금씩 농담을 하기 시작했고, 해야 할 업무도 눈에 들어왔다. 민원전화를 받는 것도 두렵지 않아졌다. 모든 것이 정지되었던 시간, 세상에 백기를 들고 바닥으로 침몰하던 나는 돈을 벌고 있구나. 그래, 이 정도면 괜찮지. 이름하여 금융 치료. 한 달을 채우고, 월급을 받기를 반복하다 보니 슬픔에서 멀어져 있었다.
당시 나를 둘러싼 감정은 '슬픔'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사실을 매일 곱씹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내 인생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되뇌었다. 모든 힘은 바닥이 났는데 다시 채우고 싶지 않았다. 세상이 무채색으로 보였다.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나의 정신 상태가 어떤 건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무망감.
'이런 상태에서 일을 하러 가는 게 맞는 건가'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존재의 의미를 잃은 채 가치 없는 일을 향해 쳇바퀴 돌 듯 일을 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었다. 억지로 회사를 가면 내가 앉을 자리가 정해져 있고, 달갑지 않은 일을 해야 하고, 친밀하지 않은 이들을 만나야 했다. 출근 도장을 찍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회사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말을 건넨다. 두렵지만 어쩔 수 없이 해냈던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살렸다. 반복되었던 무의미한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를 견뎌주었다.
* '슬픔이여 안녕'은 프랑수아즈 사강이 18세에 쓴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자신의 마음에서 올라온 감정을 비로소 마주하며 '슬픔이여 안녕'이라고 첫인사를 건넨다. 나의 글은 2년여간 나의 일상에 지독하게 붙어 있던 슬픔이란 감정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인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