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시간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by 꼼지 나숙자

"일어나라 일어나라 봄이다."

땅의 성화에 눈을 뜬 작은 생명들이 깨금발로 서서 밖을 내다보면 봄이다.

그렇게 봄은 땅속에서부터 온다. 겨울의 끝자락, 노란 복수초를 밀어 올리며 봄기운을 퍼뜨리는 것도,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것들을 깨우는 것도, 제 몸을 바스러뜨리며 새순을 밀어내는 것도 모두 땅의 몫이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수선화와 할미꽃에게 따스한 피를 돌게 하고, 춥지 않도록, 굶주리지 않도록 햇빛과 양분을 대는 일, 그리고 봄을 기다리는 농부와 정원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까지—이 모든 것이 땅의 마법이며 흙의 계획이다.

이처럼 땅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깨닫는다. 봄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땅이 먼저 봄물을 내면 새순이 움트고, 누군가 감탄사를 터뜨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봄은 겨울과 실랑이를 벌이며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그런데 봄은 자연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도 온다.

온 세상이 "영차, 영차! 봄이다. 이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라!" 아무리 외쳐도, 내 마음이 얼어붙어 있다면 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우리 집 튤립이 하나둘 피어나던 어느 날, 큰 조카가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다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토록 아름답던 튤립은 시들고, 그 자리에 양귀비가 하나둘 피어났지만, 조카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들이 쓰러진 뒤, 큰오빠의 목소리에서는 힘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두고 "겸손하라"는 하늘의 뜻이라 말했다.

젊은 시절 고생한 보람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던 오빠였다. 부모와 형제는 물론, 이웃과도 나누며 누구보다 따뜻한 황혼을 보내고 있었다. 순풍에 돛을 단 듯한 그의 삶에 닥친 갑작스러운 비보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빠는 무릎을 꿇고 더 낮아지겠다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오빠의 목소리에서, 나는 구약 성경 <욥기>의 욥을 떠올렸다.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섭리는 신비롭고도 절대적인 선(善)이며, 그 앞에서 인간은 오직 순명하고 감사와 찬양을 올릴 뿐이라는 욥의 태도가 오빠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나는 잘 안다. 오빠가 감당해야 할 충격과 비탄이 얼마나 클지를. 그럼에도 그는 슬픔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명을 택하는 방식으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빠의 봄을 응원한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내게는 뜻밖의 봄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3학년인 외손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할머니, 제가 오늘 동시 하나 문자로 보냈어요. 할머니는 꽃을 좋아하시니까, 이 시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기특한 녀석. 교실마다 사물함이 있어 굳이 교과서를 챙길 필요가 없는 요즘, 손자는 할머니에게 시를 보내주겠다고 일부러 국어 교과서를 들고 왔단다. 그렇게 해서 내게 도착한 시는,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봄의 길목에서'라는 동시였다.


봄의 길목에서​

우남희​

겨울 끝자락

봄의 길목

가거라! 가거라!

안 된다! 안 된다!

봄바람과

겨울바람이

밀고 당기기를 합니다.

그러는 사이

풀밭에 떨어진 노란 단추

손자의 말처럼, 이 시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외우고 또 외웠다. 암송을 반복할 때마다, 꽃과 시를 좋아하는 외할머니를 떠올렸다는 손자의 말이 함께 떠올라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처럼 봄은 예기치 않은 순간,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삶의 온도가 봄처럼 따뜻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다소 더딜 수는 있어도, 결국 누구에게나 봄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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