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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NIE Apr 26. 2023

이직에 실패했다.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해버린 사람의 이야기

고작 10개월을 막 채우고 다시 취업준비생으로 돌아온 지 이틀차가 되었다. 10개월 간 내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너무 긴 글이 될 것 이라 누가 볼 것 같지는 않지만 그동안의 이야기에 대해서 정리 겸 풀어보려고 한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쌓기 시작한 내 커리어를 설명하자면 '외교' 라는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2014년에 외교부가 주최하는 한 국제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나의 관심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외교부 산하기관은 크게 국제개발협력을 하는 기관과 국제교류를 하는 기관으로 나뉘는데,인턴/계약직을 했던 회사는 전자, 정규직으로 근무했던 회사는 후자였다. 후자의 기관에서 4년동안 근무하면서 대부분 선진국을 대상으로하는 업무가 많은데 난 여전히 개발도상국과 업무를 많이하는 일들을 맡게 되었다. 사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데, 나의 첫 커리어를 개발도상국 인턴으로 시작했으니 좀 더 애정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국제교류를 하는 회사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개발협력을 생각했다. 분명 처음 인턴을 시작했을 때는 개발협력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왠만하면 공익적인 일을 하고 싶었고 해외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고, 외교적인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일뿐이었는데 말이다. 자꾸 생각이 들다 보니 그래서 대학원을 가야하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당연히 공기업에 들어가면 정년퇴직을 생각하게 되기에 업무와 관련이 없는 대학원을 갔다가 돈만 날리면 어떻하지? 하는 생각에 주저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가 다녔던 공공기관은 지방이전 정책으로 본사가 제주도에 있었다. 서울에 갈 수는 있었지만 다시 어쩄든 제주로 돌아와야만 했다. 선배들 중 제주로 가족 모두 이주한 경우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클 때가 되니 결국 혼자 남겨지거나 퇴사하는 모습을 종종 보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과 현실적인 이유들이 쌓여서 결국 나는 정년퇴직을 생각하고 대학원을 가지 않았던 생각과는 모순적이게 4년만에 퇴사를 결심했다. 성격적인 문제도 있는것이 당장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마음때문에 그리고, 그 당시에는 현재 남편과 꼭 결혼하고 싶었고, 가정을 잘 이루려면 무조건 같이 사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이직이 마땅치않은 직군이니 옮길 수 있는 건 나였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직이든 전직이든 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I have been dreaming of being a Global Leader since participating in the Korea-Japan Youth Exchange program hosted by the MOFA in 2014.  

나의 영어 자기소개는 항상 이 문장으로 시작했다. 2014년 이후 나름 글로벌 리더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글로벌 리더가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외와 관련된 영향력 있는 나름의 일을 하고 싶다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2015년부터 외교부 산하기관에서 인턴, 계약직을 거쳐 그리고 마침내 정규직이 되어 경력을 쌓으며 내 커리어는 개인적으로는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2014년에 외교부 프로그램을 다녀와서 졸업논문으로 공공외교를 주제로 삼았고, 결국엔 공공외교를 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까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난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리고 하고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삶의 만족감이 컸다. 


그만두기로 결정했을 즈음에는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지금도 하는 말이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회사를 퇴사한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냥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일을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만두고 한 달 정도는 만료된 영어점수를 갱신시켰다. 그리고 그나마 전문적으로 일할 수 있어보이는 분야인 개발협력분야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대단한 목표의식을 가졌다기 보다는 그냥 면접에서 출장을 자주간다는 말에 홀려 사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일을 시작했다. 그 시점에는 남편이 돈을 벌고 있으니 나는 '적당한' 회사에 들어가서 '적당한'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이직한 회사는 첫 회사의 프로젝트를 수주받아 실행하는 회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 회사에서 무기계약직이 되는게 싫어서 회사를 옮겼던 것인데 다시 그 회사가 발주처가 되는 일을 하려고 생각했다니. 꽤나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완전 재미 없지는 않았다. 해외 출장도 자주가고, 게다가 처음 경험해보는 중앙아시아의 매력에 정말 푹 빠졌던 순간들이었다. 2022년 6월, 8월, 9월, 11월, 2023년 2월 이렇게 짧은 기간동안 무려 다섯 번의 출장을 갔다. 매 출장때마다 짧게는 9일, 길게는 16일까지 갔으니 정이 들지 않을수가 없었다. 출장을 갔을 땐 현지의 매력에 푹 빠졌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출장 마무리를 하느라 일이 힘들고 안 맞을 때에도 어찌어찌 버틸 힘이 생겼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2023년 2월까지도 벗어나려고하면 다시 내 마음이 제자리였다. 그래서 그만두지 못했다. 신을 믿는 나는 운명론자인데, 내가 이 곳에서 할일이 더 있는게 아닐까? 아직은 때가 아닌거 같다. 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직한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가지 였다. 50%정도는 주변 시선이었다. 발주처, 그러니까 내가 처음 몸담았던 회사의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가장 컸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하는 은은한 무시가 기분이 나빴다. '굳이 거기서 왜 일해?'라는 말이 가장 큰 골자였고, 선을 넘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다들 나랑 친하니까, 나를 잘 아니까 하는 말이라고 좋게 생각해보았지만 그 말들은 내 자존감을 한껏 바닥을 치게 도와주었다. 그런 잔잔한 기분나쁨이 베이스로 깔려서 일하는 내내 지냈다. 그동안 이곳에서 일하는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런 베이스들이 트리거가 되어 한 때의 나는 나의 선택 모든 것을 자책하고 있었고, 미래를 그리지 못하고 있었고, 깊은 좌절에 빠져 누가 건드리기만해도 눈물이 났다. 당장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내가 7년 전 했던 선택까지도 후회하고 있었다. 나는 인생에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이고, 누군가를 크게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자존감이 정말 거의 부서져서 아예 없던 시점이 아닐까 싶다. 그때가 2022년 11월 즈음이었을 것이다. 셀프 토닥임을 하자면, 그 이후에도 무려 5개월 가까이를 더 다녔다. 


그리고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의미는 참 좋고, 수원국의 태도도 좋고, 같이 일하는 현장 직원들도 꽤나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 (프로젝트에 마가 꼈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프로젝트 내의 이해관계자끼리 자꾸 마찰이 생기고 싸움이 생겨 프로젝트가 중간에 이런저런게 너무 많이 바뀌게 되었다. 그 뿐만아니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탓에 내가 일하는 10개월동안 거의 내가 한 모든일이 전임자의, 이른바 '똥을 치우는 일'이었다. 모든 계약서가 잘못되어있었고, 예산은 엉망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이게 잘 돌아가는 거였나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면서 매 년 사업을 조금씩 개선해온 나에게 이런 엉망인 사업이 떨어졌다는 것은 매 순간이 스트레스 였다. 전임자는 3개월씩 세번이 바뀌었었고...문제가 없는게 이상한 터였다.  


만난 그 순간 사랑에 빠져버린 그 나라와 사람들이 좋았던 것이 아니였다면 정말 한 달만에 그만뒀을 것이다.(실제로 정말 한 달만에 그만두려고 함 ㅎㅎㅎㅎ)


아무튼 이 모든것이 쌓이고 쌓일때 쯤 퇴사하려고 했으나, 내 마음이 또 나를 붙잡아서 퇴사를 연장했었다. 근데 이번에는 신기한 것이 나는 오히려 일을 하려고 했는데 3주만에 부서 내에서 큰 일이 터졌다. 자세히 글을 쓰면 나만 피곤하기에.. 결론만 말하자면, 내 의지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남의 의지로 그만두게 되버렸다. 결정은 내가 한 것이지만 이런 사건이 터진게 인연이 다 했음을 인정하지 못해서, 이제는 이 곳을 떠날 때가 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퇴사를 결정했다. 


일과 회사는 싫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키르기즈스탄과 그 프로젝트는 나름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공식종료 1개월 전에 퇴사한 것이 정말로 아이러니해져버렸다. 다행히 이제는 내가 정리할 것을 거의 다 정리하고 나오게 되어서 퇴사하기로 한 시점보다 2개월 더 일하면서 발주처 담당자도 프로젝트가 어느정도 정리되었음을 인정하였다. 회사엔 고맙다는 얘기를 못 듣고 오히려 같이 일한 발주처 담당자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10개월 간의 여정은 마무리가 되었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신을 믿는 운명론자이기 때문에 왜 내가 이 곳을 선택했었고,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해봤다. 


일단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되었다. 공공기관에 관심없는데 우연히 일하게 된 것 치고 민간기관에서 일해보니 나는 완벽하게 공공의 업무를 하는 게 맞는 사람이었다. 막 대단한 돈을 벌진 않아도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이 나에게 잘 맞는다. 누군가에겐 의미가 없어도 사람들을 지원해주고, 누군가가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런게 나한테 잘 맞는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나는 완벽하게 '국익'을 위해서 일하는 일에 큰 보람을 느낀다. 나라를 위해 일할 때 나는 행복해진다. 그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의 나라가 늘었다. 내 제 2의 고향이었던 라오스보다 더 사랑하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재취업을 한다면 일주일정도 꼭 여행을 가고 싶은 나라가 된 것이다. 정말 다양한 국가, 지역과 소통하며 일을 했지만 중앙아시아는 처음이었는데, '중앙아시아는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정말 뼛속까지 깊게 느껴지는 10개월이었다.


그리고 또 내가 되어야 할 사람과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많이 느꼈고, 그 이전 직장 두 곳에서 일하면서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지에 대해서도 알게되었다. 


또, 내가 아직까지 주재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첫 기관에서 무기계약직을 안하게 된 이유도 주재원에 대한 꿈이 있어서였고, 그 중에서 재단을 선택했던 이유도 주재원을 가고 싶어서였다. 재단을 퇴사한 이유도 주재원을 당장 나가지 못하는 부분도 30%는 되었으니 말이다. 해외사무소로 첫 커리어를 시작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해 굉장히 크게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커리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남편이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스스로 당당하게, 내 커리어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살아야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커리어에 나의 자존감이 결정되고 내 스스로 커리어로 나를 정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커리어가 어찌될지 모르지만, 내가 지난 10개월간 배운 위의 것들을 바탕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기위해 여러가지를 도전해보려고 한다. 서른 넷, 30대 중반이 막 시작되는 시점에 찾은 내 새로운 여정을 스스로 응원하며 글을 이만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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