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이 노스탤지어가 되는 세상
-언니! 나 필름 카메라 샀어!
오랜만에 친한 동생과 카톡 대화를 하는데 자랑하듯 던진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축하해’? 옛날 카메라 산 게 축하할 일은 아니지 않나? ‘그걸 왜 샀어?’ 뭐 사고 싶으니까 샀겠지, 필요해서 살 물건은 아니니까. 결국 애매모호하게 말을 돌리고 말았다.
-오. 그래? 요즘도 필카를 파는구나. 하긴 요새 어린애들은 필름 넣는 법도 모른다더라.
-웅. 내일 매장 가서 배워보기로 했어.
-뭐라고? 잠깐, 너 필름 카메라 처음 써보는 거야?
-어릴 때 일회용 카메라는 써봤지.
세상에. 이런 걸 두고 세대차이라고 하는 거구나. 생각해보니 나보다 9살이나 어린 친구다. 새삼 그 차이가 확 와 닿았다. 필름을 모르는 세대. 현상과 인화의 개념을 들어본 적도 없는 세대가 고작 10년 안쪽으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내 기억은 과거로 소환됐다. 필름이 당연하고 디지털 사진은 그 개념조차 몰랐던 시절. 고등학교 때 사진 관련 동아리 활동을 했기 때문에 어렵사리 수동 카메라를 빌려 용돈을 모아 비싼 슬라이드 필름을 사곤 했다. 그 당시에 36장 필름 하나에 4~5000원 정도 했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아껴서 찍었다. 손가락으로 구도도 재보고, 노출과 셔터 속도를 하나하나 확인해서 머릿속으로 사진의 밝기를 가늠했다. 학교 앞엔 단골 사진관이 있었다. 사진을 찾을 때까지는 내가 찍은 게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진관 문을 열 때마다 늘 기대 반 설렘 반의 마음이었다. 받자마자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스스로 감탄을 했다. 캬. 멋지다. 내가 찍은 세상. 예술이네.
동아리 활동은 그만두고서도 사진은 오랫동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취미였다. 굳이 취미랄 것도 없이 내가 처음 인턴 생활을 시작했던 2004년까지도 잡지사에서는 여전히 필름 사진을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느린 변화였다. 모두가 크고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게 되고, 나중엔 휴대폰이 디지털카메라의 아성을 무너뜨릴 세상이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사진 찍는 선배들이 투덜대듯 이야기하던 게 생각난다. 디지털 사진에는 깊이가 없다. 기다리고 고심해서 찍은 사진 한 장의 품격을 절대 따라올 수 없다. 포토샵으로 만진 사진은 그게 사진이냐 그림이냐.
그 얘길 들으면서 난 어떤 생각을 했었더라.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우리 세대를 구세대라 생각하지 않았던 건 디지털 문화를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십 대가 되자마자 ‘디시인사이드’ 같은 사이트가 생겨났고 수많은 디지털카메라, 전자기기의 범람 속에 빠르게 정보를 습득해나갔다. 나는 22살 때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45만 원짜리 중고 디지털카메라를 샀는데 무려 ‘200만 화소’ 짜리라 자랑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메모리카드만 있으면 필름값과 현상 값이 더 이상 들지 않아 좋았다. 그렇게 필름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버린 기억도 없는데, 다 사라졌다. 그런 줄 알았는데... 저 친구처럼 아직도 필름을 사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구나. 희한한 세상.
나는 문득 전자책이 디지털 사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완성도와 깊이를 따지자면 수많은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종이책과 비교할 바가 안 된다. 혼자서도 뚝딱 만들 수 있고, 교정교열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책도 수두룩하다. 아마추어도 얼마든지 책을 출간할 수 있다. 더 이상 출판이 전문분야가 아니게 된 것이다.
옛날 사진 선배들의 한탄이 바로 그런 것이었으리라. 자신들의 전문 분야가 사라진다는 것. 그동안 쌓아왔던 가치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로의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이제 사람들은 예술을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지 않는다. 오늘 먹은 점심을 기억하고 싶어서, 그냥 빛이 예뻐서, 메모하기 귀찮아서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찍은 사진은 대부분 종이로 인화되지 못하고 데이터 세상 어딘가를 영원히 떠돌다가 잊힌다.
출판도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사람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사보지 않는다. 기껏해야 팔리는 건 귀여운 캐릭터로 ‘내일은 좋은 일만 생길 거야’류의 간지러운 말만 읊조리는 파스텔 표지의 책들이다. 사람들은 이제 긴 글을 못 읽어. 당연한 말만 하는 걸 굳이 왜 읽는지 몰라. 요샌 아무나 책 쓰더라. 책을 몇 권 내고도 거의 수익을 내지 못한 나와 동료 작가들의 한탄은 그 옛날 사진 선배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겹쳐졌다.
미래의 책에는 대단한 것만이 쓰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 뭐가 쓰일까. 정답은 ‘아무거나’. 지난 휴가를 기억하고 싶어서, 다이어트 노하우를 나누고 싶어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내 의견을 알리고 싶어서..... 누구나 가볍게 커뮤니티에서 의견 표출하듯이, sns에 글 올리듯이 전자책을 출간할 수 있다. 그게 어쩌다 독자들의 수요와 맞아떨어지면 돈을 좀 벌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터치 한 번으로 사진 찍듯이 전자책 출판은 어려운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이 많긴 하지만, 그 방향은 아마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필름이 당연했던 시절의 내가 정신 차려보니 디지털카메라를 쓰고 있었던 것처럼.
문제는 이제 나는 부정할 수 없는 기성세대라는 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디지털카메라를 쓸 때만 해도 나는 솜털 보송한 만 이십 세였단 말이다. 글 쓰는 정규 교육을 받고, 글을 써서 돈을 벌었고, 정식으로 출판을 하는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이 변화가 자연스럽지만은 않다.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변하려고 애를 써야 겨우 따라갈까 말까 한 것이다.
가끔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에 어안이 벙벙하지만, 내가 따라가든 그렇지 않든 변한 세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만큼은 안다. 그리고 잘 만든, 두툼한 책 한 권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란 것도 안다. 한 장 한 장 인쇄기로 글자를 찍어낸 종이책을 진한 노스탤지어의 마음으로 넘겨보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이때는 책장 넘기는 맛이 있었지, 갓 인쇄된 종이 냄새를 참 좋아했는데.... 이 책 좋아해서 종이책으로 한 번 사봤다며 신기해 하는 아주 어린 친구의 자랑에 나는 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종이책이 당연하던 시절을 떠올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