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이 존재한다는 증거
책을 쓰는 일을 산고에 비교하는 작가들을 종종 보아왔다. 열 달을 뱃속에 품고, 인고의 시간을 거쳐 엄청난 고통을 견뎌내며 세상에 내놓은 자식과도 같다는 것이다. 나 역시 작가로서 일견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창피한 일이지만 인쇄소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첫 책을 두 손에 받아 들었을 때 눈물이 찔끔 났었다. 내 책이 서점 매대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의 뿌듯함은 또 어떤가. 마치 장성해서 사회에 첫걸음을 내디딘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와 비슷할까.
그렇다면 출판사의 일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출산을 돕는 산부인과 의료진? 출산 과정을 함께 의논하고 공유하는 배우자나 가족? 성공적인 출산이 이루어지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공여자임은 분명하다. 내게 첫 책을 안겨준 편집자님의 표정도 꽤 뿌듯해 보였던 기억이 난다. 일종의 보람이라고 해야 할까. 출판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 전자책이라는 것이다. 컴퓨터 앞에서 프로그램을 가지고 씨름하는 시간 속에서 출판의 매력을 느끼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전자책은 형체와 질감이 없다. 아무리 정성 들여 만들어봤자 신선한 인쇄소 냄새도, 두툼함이나 묵직함도 느낄 수 없다. 파일로 만들어 업로드하면 끝. 조금 허전하기까지 하다.
그나마 ‘출판’ 하는 기분이 조금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에 납본할 때다. 대한민국의 모든 출판사들은 발행된 출판물을 국립중앙도서관에 제출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도서관법 제20조).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출판물을 일종의 기록물로 보고 국가 차원에서 저장, 관리하는 제도인 셈이다.
전자책도 예외가 아니다. 다 만든 책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에 책 정보, 저자 정보 등을 등록하고 번호를 부여받아야 하는데 이를 ISBN(International Standard Book Number, 국제표준도서번호)이라 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고,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듯이 모든 책들이 이러한 고유성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주민등록증까지는 안 나오지만 바코드는 다운로드할 수 있다.
ISBN 번호를 받았으면 이제 책을 납본할 차례다. 종이책의 경우에는 택배로 보내거나 아니면 직접 국립중앙도서관에 방문해서 책 2권을 제출해야 한다. 1권은 보관용, 1권은 도서관 열람용으로 사용된다. 판매용 도서는 1권의 정가만큼 가격을 보상해주는데 이를 위해 보상청구서도 제출하고, 세금계산서도 발행해야 하는 것도 출판사의 일이다. 전자책 납본은 직접 책을 보낼 필요가 없으니 좀 더 간편하다 해야 할까.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온라인 자료 납본 페이지에서 몇 가지 정보를 입력하고 전자책 파일을 업로드하면 된다. 물론 책값 보상을 받으려면 똑같이 보상청구서와 세금계산서를 제출해야 한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썼지만 나 같은 초보 출판인에게는 역시 낯선 일이라 몇 번 실수를 거듭하고 한번 반려되기도 하고.....(도서관 담당자가 답답했는지 두 번이나 전화해서 가르쳐줬다). 뭐 결국은 성공했으니까 된 거다.
서점에 책을 넣을 때도, 네이버와 같은 포털 사이트에 검색이 되도록 등록할 때도 이 ISBN 번호는 필수다. 형체와 질감이 없는 전자책이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이유다. 형체 없는 것을 만드는 일의 공허함이 이렇게 달래진다는 게 참 우습기도 하다. 여전히 종이책을 좋아하고, 쓰는 사람으로서 변해가는 세상에 맞는 마인드를 만들어가는 건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이다.
서점에 직접 가는 대신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두 손으로 책을 들고 책장을 뒤적이기보다 손끝으로 단말기를 터치하는 질감이 익숙해진 세상. 더 이상 형체에 집착하는 것은 옛날 방식이라고, 초보 출판인은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기로 한다. 형체가 있든 없든,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그렇게 책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