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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Mar 22. 2021

삭발을 했다_조개인

2W매거진 9호 <알을 깨고 나온 여자들> 이달의 에세이 선정작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9호 <알을 깨고 나온 여자들>편에 조개인 작가의 '삭발을 했다'가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자의 머리카락이란
관객을 상정하고 메시지를 전송하는
전광판 같은 걸까?
나를 제외한 모든 지구인이 합의한 것을
홀로 뒤늦게 알게 된 것만 같았다


결정적인 이유가 뭐였을까? 커트만 하는데도 미용실에 가는 게 귀찮고 왠지 커트비도 아까워서? 상시로 약을 쓰는데도 겨울이 오면 아차 하는 사이에 날리는 비듬에 이골이 나서? 엄마가 미국에 계신 외할머니를 간병하느라 몇 개월 집을 비운 사이에 엄마 눈치 보느라 못 하던 짓을 해 보고 싶어서? 머리카락에 내가 끌려다니는 것에 대한 누적된 짜증이 폭발해서? 그냥 누가 됐든 아무나 엿 먹어라 하는 마음에? 그리 대단한 각오나 결심 같은 것도 없이,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다가 그냥, 일상적으로 쓰던 문구용 가위로 숭덩숭덩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세면대에 놓여 있던 남동생의 휴대용 면도기로 말끔하게 삭발했다. 2019년 1월, 막 서른셋이 되었을 무렵이다.

머리를 다 밀고 나와서는 제일 먼저 우리 강아지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얼굴을 가까이 대자마자 강아지가 민둥해진 머리를 핥아대서 사진도 그렇게만 서너 장이 찍혔다. 사람으로서는 남동생이 가장 먼저 내 민머리를 봤는데, 앞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지만 얼마 후 내가 삭발에 썼던 면도기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충동에 내몰렸다고는 하지만 말없이 남의 물건을 쓰고 말았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었다. 사과할 법도 한데, 왜인지 나도 동생도 그 후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꽤 기분이 좋았다. 거추장스럽게 앞을 가리거나 무겁게 덥수룩한 느낌도 없이, 가볍고 시원했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 수고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날아갈 것 같았다. 외출하면 뒷덜미가 서늘하긴 했지만, 그것마저 상쾌하게 느껴졌다. 삭발 하나만으로 이렇게 편하고 좋은데, 애써 머리카락을 이고 살게 만드는 것을 새삼스레 거리를 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 혼자 산뜻한 해방감을 만끽하고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언제나의 연초처럼 설 연휴가 다가왔다. 친척들 사이에 얼굴을 비추면 비추는 대로 안 비추면 또 안 비추는 대로 시끄러울 게 불 보듯 뻔했다. 어차피 밝혀질 삭발, 그냥 일찍 폭탄을 터트리자 싶어(솔직히 이때도 그렇게 깊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혼자 털레털레 친척들이 모인 큰이모네로 향했다.

역시나, 다들 내 민머리를 처음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큰이모는 내가 심적으로 크게 힘들어서 그런 돌발 행동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고 외삼촌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건 좋지만 그렇게까지 반항적으로 굴 필요는 없지 않냐는 말을 했다. 심지어 덤덤해 보였던 남동생도 실은 큰이모에게 전화로 크게 충격을 받았음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모두가 나의 삭발을 두고 어떤 용암 같은 속내를 공격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짐작했다. 그냥 내가 편하고 좋아서 한 것이라 몇 번을 말해도 도무지 곧이곧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여자의 머리카락이란 관객을 상정하고 메시지를 전송하는 전광판 같은 걸까? 나를 제외한 모든 지구인이 합의한 것을 홀로 뒤늦게 알게 된 것만 같았다.

설 연휴에 시종 민머리만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곧 화제는 가라앉았지만, 큰이모는 한 번은 해 봤으니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소동을 더 길게 끌고 싶지 않아서 대충 알았다고 답을 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정말 그 이후로 다시는 삭발하지 않았다. 삭발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경험해서 익히 알고 있음에도. 귀찮아서 하는 삭발에 훨씬 더 귀찮은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계산에서인지도 모르겠다.

삭발하고픈 마음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금세 덥수룩하게 자라나는 머리털이 주체가 안 될 때면 시원한 삭발의 맛이 떠오른다. 언젠가는 삭발 한 채로 경제생활에 임하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보고 싶다는 아주 작은 희망도 있다. 그래도 2016년, 서른 살의 내가 생애 처음으로 한 쇼트커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긴 머리 가발을 사서 쓰고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서른다섯의 나, 그 후의 나는 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듯한 예감이 든다.


글_조개인



[Mini Interview] 조개인 작가

"저만이 알고 경험한 것들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87년에 태어났습니다. 집에서는 남동생만 둘인 장녀고, 살면서 주민등록상 이름이 두 번 바뀌어서 현재 태어났을 때 붙여진 것과는 단 한 자도 일치하지 않는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간판만 좇아 들어간 대학에서는 엉겁결에 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성소수자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직감적으로 나는 남들과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았고 동시에 이 점을 사람을 봐 가면서 드러내고 감춰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언제가 시작이었는지도 모를 만큼 아주 오랜 시간 우울증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영민하고 사랑이 많은 회색 강아지와 3년째 동거 중입니다. 조개인이라는 필명은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 줍는다는 말이 멋있어서 그렇게 살자는 마음에, 또 한 사람의 개인(個人)이라는 뜻으로 붙였습니다.


Q. 2W매거진에 기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무언가를 말하고 드러내려 해도 이미 쌓인 공들이 많아야 그것이 유효해지기 마련인지라 미리 실패를 짐작하고 입을 닫곤 했는데, '여성이라면 누구나'라는 말에 어떤 안도감을 느끼며 가벼운 걸음으로 문을 두드릴 수 있었습니다.


Q. 에세이 쓰기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지금껏 과거에 저를 크게 할퀴었던 것들에 대하여 주로 썼기 때문에, 그것들을 복기하고 글로 정제하는 과정 자체가 매번 힘겨웠습니다. 최근에 제가 여태까지 2W매거진에 기고했던 글들을 쭉 다시 읽어 보았는데, 그 혹독한 시간들을 버텼던 나도 또 그것들을 애써 글로 꾹꾹 눌러쓴 나도 참 열심히 분투하며 살았구나 하는 실감에 보람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Q.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저만이 알고 경험한 것들을 계속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를 통해 저와 비슷한 것을 알고 경험하신 분들에게 작게나마 위안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필진들의 추천글

"제목부터 확 사로잡는 뭔가가 느껴졌는데, 아니나다를까 도입부부터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이번 호 주제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이지 않았나 싶었어요. 조개인님이 전에 쓰신 글들을 보면서도 느꼈는데 독자를 끌어당기는 화법을 잘 알고 있는 분인거 같아요. 짧은 분량이지만 메시지도 충분히 전달하고 있고요. "


"조개인 님의 <삭발을 했다>를 읽고 그 도전이 부러웠다. 생각에 쉽지 않을법한 일인데 삭발이라니! 내가 대학교 다닐 때 딱 한 번 탈색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큰마음 먹고 한 일인데 삭발이 웬일인가! 그 용기가 존경스럽다. 조개인 님이 언젠가 또 삭발할 거라는 기대가 드는 건 뭘까. "


"짧은 단발조차 귀찮아서 숏컷을 할까? 스포츠 머리를 해볼까? 고민하던 제게 삭발(!)을 해보았던 조개인님의 글은 부러움 반 경악 반이었습니다. 삭발을 해서 머리카락과 어느정도의 꾸밈노동에서 해방된 것은 잠깐. "반항하냐", "공격적이다"라는 또 다른 편견과 족쇄, 고나리가 막 날아들었을 것 같아요.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던 나날들, 그리고 사실은 지금도 계속되는 나날들. 짧게 머리를 자르면 "실연당했냐?" 머리를 기르거나 스타일을 바꾸면 "잘 보일 사람 있냐?" 와우... 어찌나 여자의 머리에 관심들 많으신지. 

"아뇨, 별 생각 없습니다. 머리를 이렇게 하면 제 기분이 조크든요"로 설명 생략하고 싶어요. "




이 작품은 2W매거진 에 수록되어 있습니다9호 <알을 깨고 나온 여자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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