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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Apr 20. 2021

땅, 꽃, 셋_드므

2W매거진 10호 <봄의 이야기들> 이달의 에세이 선정작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10호 <봄의 이야기들>편에 드므 작가의 '땅, 꽃, 셋'이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봄의 마음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코로 들이쉬어지는 숨이 싱그럽다.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나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준비된 것을 알았다. 





20층 높이에서 지상의 봄을 느끼려면 눈이 좋아야 한다. 난 다행히 양쪽 시력이 1.0이다. 무균 병실 내부는 공기조차 정화되어야 하기에 창문을 열 수 없다. 나는 금붕어처럼 빠끔거리며 코 아래 멀찍이, 창 너머에 시선을 깔았다. 


2018년 봄.

3월부터 시작된 기침이 병원을 꾸준히 다녀도 멈추지 않았다. 살아생전 보지 못한 주황색 콧물이 나더니 얼굴에 실핏줄까지 터졌다. 급성 백혈병 진단, 봄이 끝나고 여름을 맞이하던 6월의 일이다. 응급실에 입원했다. 직장을 급히 그만두어야 했다. 골수이식이 결정되었다. 그해 성탄절, 이식 병동으로 입원했다. 눈과 햇빛과 비가 번갈아 가면서 낮과 밤이 흘러갔다. 제대혈로 이식한 나는 회복 속도가 한참 더뎠다. 이 때문에 남의 퇴원을 부럽게 바라보는 환자 역할은 내 몫이었다. 처량한 마음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창으로 시선을 주는 일뿐이다.


2019년 봄.

벌거숭이 민 대머리에 순면 모자를 챙겨 쓰고 그 위에 보호 헬멧까지, 위생 마스크도 잊지 않은 채 핫팩을 부여안는다. 어기적어기적 수액 걸이를 끌면서 가볍지 않은 발걸음으로 20층 이식 병동 휴게공간의 익숙한 자리에 내 몸을 앉힌다. 광합성에 목마른 식물처럼 옅었다. 자고 나면 빠져있던 몸무게는 41kg까지 찍었다. 나의 주된 일과는 우두커니 큰 창문 앞에 붙박이로 있는 것. 어항 속 금붕어처럼 빠끔거리며 코 아래 멀찍이, 창 너머 깊은 아래로 시선을 최대한 멀리 내던졌다. 코가 있어도 무용지물, 봄 내음은 맡을 수 없다. 병원 코앞의 낮은 화단부터 근처 공원의 큰 나무까지 내 두 눈으로나마 어루만져 본다. 지상에 펼쳐지는 풍광은 자동으로 미니어처 필터 모드가 되었다. 20층 아래, 눈길도 한참 내려가야 가닿는 지상의 마른 가지 곳곳에 노랑, 하양, 진홍의 아른아른한 것이 수 놓여 있었다. 땅 위의 모든 꽃은 나에게는 너무나 멀리 있어서 안개 꽃망울만큼이나 작고도 더 작게 보였다. 노랑 물감, 진홍 물감이 점처럼 찍혀있는 모양이다. 개나리와 철쭉은 꼭 화가가 무심히 땡땡 찍어놓은 물감처럼 앙증맞게 점점이로 저-어기 아래 있었다. 나는 조물주도, 선녀도, 그리스 여신도 아닌데 공중에 외따로 마련된 유리 전망대에 갇혀 있던 셈이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닌, 다만 사람인데도 지상으로 내려가 땅을 밟지 못하고 있었다.


그 언젠가 고등학교 절친 삼인방 중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벚꽃잎이 손바닥에 떨어지면 소원이 이뤄진대!”

우리는 합정역 뒤편 작은 가로수 골목에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사뿐하게 손바닥에 안착할 꽃잎을 제각기 먼저 받아들이겠다고 허둥댔다. 사람 많지 않은 골목이었지만 남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길 걸어가던 각자의 위치에서 무작정 양팔을 하늘로 뻗어냈다. 손바닥은 있는 대로 쫙쫙 편 채로.


(꽃비) 하얗거나 약간의 분홍을 머금은 그 꽃잎들 한 장, 한 장, 또 한 장씩들이 바람결에 따라 이리저리 허공에서 땅바닥으로 낙하하는 그 장면.


(친구들의 내숭 없는 깔깔깔 웃음소리) 수십 장의 꽃잎이 우리에게로 하늘하늘 내려왔다. 우리 셋은 꽤 낭만적인 마음으로 신이 나서 웃음 지었다. 자기 손바닥에 먼저 꽃잎을 받겠다며 아웅다웅했다. 꽃잎이 손바닥 위에 닿지 않고 아스라이 스쳐 지나칠 때마다 아쉽고도 우스꽝스러운 한숨들이 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지……. 꽃잎은 시차를 두고 결국 우리 모두의 손바닥에 내려앉아 주었다. 봄의 마법이었다. 흐뭇한 마음이 두근대던 20대의 싱그러운 우리들이었다.


내가 있는 병실에서 한참 내려가야 가닿는 땅, 아직 만질 수 없는 봄에게 중얼거렸다. 서둘러 떠나가지 말아 달라고. 무사히 살아나가서, 나의 두 발로 땅을 딛고서, 그 이름대로 ‘봄’을 ‘보-고’ 싶었다. 다시 꽃잎을 내 손바닥으로 받아내고 싶었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팔랑거리며 나에게로 다가오는 꽃잎을 가까이에서 놓치지 않고 살펴보고 싶었다. 너 참 예쁘다고, 보고 싶었다고, 살며시 어루만지고 싶었다. 거추장스러운 수액 걸대 없이 환자복 아닌 예쁜 옷을 입고서 그 친구들과 함께 다시 합정동 골목길에 있고 싶었다. 사람 오가는 작은 골목에서 소녀처럼 하늘대며 걸었던 한낱 봄의 어느 날이 다시 오길 간절히 바랐다.


2020년 봄.

사진첩을 돌이켜보았다. 내 핸드폰에 흔한 꽃 사진 한 장 없던 시기. 그간 나에게는 적잖은 일이 끊이지 않고 생겨났다. 깊은 상처를 숨기고 회복하기 위해 나는 마음으로 울면서 굴을 팠다. 불과 일 년 전, 기온 변화조차 없는 높은 병실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그토록 갈망했었던 그 봄이었는데. 

나의 겨울잠은 봄도 보지 못하게 길게 나를 붙잡았다. ‘봄’은 나의 황량해진 몸과 마음을 그만 알아차렸는지 모른다. 땅굴 속 시간을 온전히 견디어낸 후에야 나오라는 의미였을까. 그래서 나를 꺼내지 않고 조용히 사라져 주었을지 모른다. 생동하는 푸릇함과 꽃 잔치의 아름다움은 오롯이 지상에서만 향유 할 수 있는 것. 즉, 땅 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땅굴 속의 나는 그를 진심으로 목격하지 못했다.


2021년 지금.

오늘은 비가 온다. 

거울 속 나의 머리카락은 제법 자라서 이제 단발이다. 독한 항암으로 머리카락은 물론 속눈썹까지 다 빠져버렸던 내 과거는 찾아볼 수 없다. 익숙하고도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드라이어로 말린다. 나갈 채비를 한다. 오랜만에 보고 싶은 전시가 생겨 집을 나선다. 우산도 챙겼다. 목적지에 닿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뜻밖의 선물이 뜰 안에서 나를 반긴다. 놀라웠다. 반가웠다. 노란빛이 산수유와 개나리에서, 분홍빛이 매화와 진달래에서 쨍하게 발하고 있었다. 비를 맞은 식물들은 그 향과 빛이 더욱더 짙어지기 마련이다. 봄비로 진해 버린 고운 빛이 곳곳에서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호화로운 크기의 꽃나무들이 돌담 안뜰에 널려있을 줄이야. 

지난해에 마주치지 못한 그 존재는 나 모르게 바삐 지내고 있었구나. 비구름을 퀵보드 삼아 부지런히 곳곳을 다녔구나. 한바탕 수고로운 일을 지치지도 않고 해내 주었구나. 

봄의 마음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코로 들이쉬어 지는 숨이 싱그럽다.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나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준비된 것을 알았다. 

올해 벚꽃이 피는 날, 절친 셋에게 만나자 해야겠다. 따스한 두근거림도 다시 시작된다. 이제 꽃 같은 나이는 아니더라도 서로를 보며 짓는 미소는 여전히 그 싱그러운 꽃잎들을 닮아 있을 테다. 

높이 솟은 유리 전망대 밖으로 내려와 흙 땅을 밟아 좋은 오늘, 

아직 살아 있어서 좋은 이 봄.

다시 서로를 만나 ‘봄’을 기뻐해야지.


오늘은 벚꽃 구경에 입고 갈 예쁜 옷 한 벌 사야겠다.


글_드므





[Mini Interview] 드므 작가

"따스한 온도가 가슴과 겨드랑이 언저리에 머무는 글을 쓰고 싶어요"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평범히 일하고 결혼하며 재미나게 살았어요. 이 ‘평범’은 혈액암(백혈병) 진단으로 갑자기 깨져버리긴 했죠. 벌써 조혈모세포 이식 후 2년이 넘었네요. 든든한 남편과 함께 자식같은 반려견 키우며 살고 있어요. 


Q. 2W매거진에 기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우연히 2W 피드를 봤어요. 내 글을 어딘가로 보낼 수 있는 기회 같아서 설렜죠. 얼굴 모르는 이들이 내 글을 읽어본 뒤에 잡지라는 시각적 매체로 세상에 내놓아 준다고? 집에서 바닥을 기고 있는 저 스스로에게 새로운 시도를 해주고 싶었어요. 


Q. 에세이 쓰기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행복할 때는 글 한 편의 마침표를 찍을 때, ‘아, 이렇게 글 하나가 마침내 맺어졌구나.’하고 좋아해요. 슬플 때는 글을 쓰거나 고치려는 에너지가 강할 때 뭔가 좋지 않은 말을 듣는 것이에요. 나 스스로뿐 아니라 주변의 에너지로 영향을 잘 받는 편이라 그럴 때 김이 새어나가는 저를 보면서 그 상황 자체가 좀 서글퍼요(그러다가 또 저를 회복시킬 무언가를 찾아내고 다시 기운을 차리는 편이라서 그럭저럭 괜찮은 편입니다). 


Q.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주변을 보면 한 집 걸러 다 암을 직접, 간접적으로 겪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니라면 정말 다행이에요!) 

저에게 병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고 일상이에요. 더군다나 완치까지는 앞으로의 더 긴 시간이 필요해요. 병은 환자는 물론 보호자의 마음을 좀먹을 때가 많아요. 작고 일상적인 것들로 시선을 돌려서 삶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이 들게 하는 글(마냥 우울하다거나 억지로 행복을 강요하지 않는), 다 읽고 나면 따스한 온도가 가슴과 겨드랑이 언저리에 머무는 글을 쓰고 싶어요.

제 글을 보시고 무언가 남으셨다면 그 자체로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해 주시니 제 삶의 소중한 순간입니다. 새로운 봄꽃들이 나고 연둣빛 신록이 찾아오는 계절입니다. 꽃과 생명이 넘치는 자연을 살피며 기쁨 하나씩 얻어가시길 가볍게 권해봅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실한 감사를 드립니다.



필진들의 추천글

"읽으면서 눈가가 촉촉히 젖었던 기억이 나네요. 시간 순서대로 담백하게 아팠던 기억을 그대로... 거의 기록에 가깝게 쓰셨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았던 멋진 에세이였습니다. 우리 모두 봄이 오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만, 누구보다 진심으로 그 봄을 온몸으로 맞았을 작가님이 상상되며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몇 해를 보내며 겪었을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싶다. 친정에도 시댁에도 같은 일이 있었던 터라 남 이야기 같지 않다. 예쁜 옷 입고 절친 셋과 만나 꽃놀이는 했을지 궁금하다. 떨어지는 꽃잎을 꼭 잡아 얼굴도 모르는 드므 님의 평온을 빌어주고 싶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몇 해의 봄을 보상이라도 받는 듯 오래 오래 절친 셋과 합정역 뒤 가로수 길의 봄을 즐기길. 덧붙여 이미 드므 님이 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추운 겨울 이겨내고 활짝 핀, 세상 어느 꽃보다 아름다운 꽃이라고."


"나는 이 문장을 오래 떠올렸던 것 같다. 한바탕 수고로운 일을 지치지도 않고 해내 준 봄이 보내는 응원의 마음을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받고 싶어졌다. 싱그러운 마음으로 크게 숨을 내쉬면서 이 봄, 어쩐지 행복해지고 싶어졌다."


"소설을 읽는 것처럼 푹 빠져서 읽었어요. 작가님의 봄을 응원합니다."










이 작품은 2W매거진 10호 <봄의 이야기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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