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W매거진 14호 <내 생의 뜨거운 순간> 이달의 에세이 선정작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14호 <내 생의 뜨거운 순간>편에 아리 님의 '빛나는 구두를 신고 뜨겁게 원투쓰리'가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르겠다. 왜 춤이었는지.
그때 나는 무엇이든 홀딱 빠질 것이 필요했다.
새로운 것이면 더 좋았고.
오토바이에 앉아 시동을 건다. 희미한 달빛이 고요한 밤, 하늘하늘한 목도리가 바람과 함께 달린다. 낮에 내린 비가 나뭇잎에 맺혀 있다가 스치는 바람에 후드득 헬멧 위로 떨어진다. 서늘한 바람을 가르며 열대의 밤길을 달리던, 내 생애 가장 뜨거운 시절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솜씨 좋게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안장을 열어 구두를 꺼낸다.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비를 피해 후다닥 계단을 오른다. 건물은 길가에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계곡의 능선을 따라 비밀의 공간처럼 아래층이 나타난다. 아래층 베란다 앞으로 달빛 아래 시커먼 계곡에서 쭉쭉 뻗은 야자나무의 실루엣이 늠름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빨간 구두를 신는다. 구두에 촘촘히 박힌 큐빅이 천장의 둥그런 대나무 등 불빛에 반짝 빛나면 내 마음도 덩달아 환해진다. 젬베와 기타, 건반이 경쾌하게 뽐을 내기 시작하고 얼큰한 가수들의 목소리가 더해지면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홀로 또각또각 걸어간다. 첫 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비르 미 비다(vivir mi vida)’다. 스페인어로 내 삶을 살겠다는 뜻! 친구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빛나는 구두가 플로어를 누비는 동안 신나는 음악에 맞춰 열대의 하늘로 둥실 떠오르는 것이 마치 내 삶 같다.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보름달이 환하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보름달이 풍성해진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나를 바라본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때 그 둥근 달과 그 아래서 환하게 웃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발리 우붓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운 곳. 어느 날 갑자기 긴 여행을 훌쩍 떠나 터를 잡은 발리의 산속 시골 마을 우붓에서 나는 오토바이를 탔고 논두렁을 걸었고 요가를 했으며 무엇보다 춤을 췄다. 흥겨운 라틴 음악에 맞춰 살사와 바차타, 키좀바를 추었다. 친구들과 낯선 이들과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신나게 춤을 추었다.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아내도 아닌, 오직 나 자신이 되어 밤마다 음악에 몸을 묻었다. 매일 열대의 선선한 밤공기를 가르며 뜨겁게 춤을 추었다.
원투쓰리 파이브식스세븐. 일주일에 서너 번, 밤마다 춤을 추러 다니던 날들이었다. 처음에는 물론 어색한 배움의 시기를 거쳤다. 춤이라곤 모르던 내가 춤을 춰보겠다고 마음먹기까지 수많은 머릿속 다짐과 철회를 거치다 결국 마음먹고 최초로 원투쓰리 파이브식스세븐을 중얼거리며 발을 움직이기까지, 어쩌면 우붓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듣던 살사 수업이 곧 일주일에 두 번, 그리고 다시 네 번으로 늘어났고, 종국에는 밤마다 라틴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거의 매일 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있다고 생각했지만, 춤을 출 때마다 언제나 조금씩 더 살아났다. 내내 걸치고 있던 우울도 던져버리고 점점 더 많이 웃었다. 두 발을 질질 끌던 무기력도 떨쳐버리고 예쁜 구두를 신고 가뿐하게 춤을 추었다.
모르겠다. 왜 춤이었는지. 그때 나는 무엇이든 홀딱 빠질 것이 필요했다. 새로운 것이면 더 좋았고. 결국, 낯설었지만 오래 동경했던 춤을 선택했다. 아니 어쩌면 춤이 나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춤을 춘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그라들던 나였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고집스럽게 웅크리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외쳤다. ‘그래! 한 번 해보지 뭐!’ 무수한 저울질 끝에 기꺼이 옮긴 한 발짝 덕분에 나는 뜨거웠던 한 시절을 얻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을 것이다. 내 안의 열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기, 내 안에 장작을 얼마나 가졌는지 살펴볼 수 있는 시기. 그렇게 한 번 활활 타보면 알게 된다. 내가 얼만큼 타오를 수 있는 사람인지. 물론 처음부터 불이 잘 붙지는 않을 것이다. 몇 번씩 사그라지는 불씨를 겨우 다시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불을 붙이고 싶은지 확신도 부족할 것이다. 춤을 추기 전에 나 역시 그랬다. 두려웠고, 주저했다. 하지만 결국 한 발짝 걸어 나갔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더니 어느새 마음에 불이 활활 붙어 새로운 내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우붓을 떠났고 춤추는 삶은 잠시 멈춰 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 덕분에 나는 언제든 다시 장작을 태울 수 있음을 안다. 또 태울 준비도 되어있다. 다음에는 무엇으로 태울지 그건 아직 모르겠다. 다시 춤이 될 수도 있고 아마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언젠가 내 마음은 또 움직일 테고, 나는 잠시 주춤하겠지만 결국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그래! 한 번 해보지 뭐!’ 그리고 내 안의 장작을 활활 태울 것이다. 궁금하다. 다음에는 또 무엇이 나를 타오르게 할지. 무엇이든 뜨겁게, 비비르 미 비다(vivir mi vida)!
글_ 아리
동남아가 체질. 발리 우붓과 말레이시아 조호바루. 읽고 쓰고 번역하는 사람.
https://brunch.co.kr/@ariblossom
[Mini Interview] 아리 작가
"새로운 나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남의 글을 오래 옮기다가 이제 내 글도 쓰기 시작한 아리입니다. <결혼에도 휴가가 필요해서>를 썼어요. 지금껏 옮긴 글보다 훨씬 많은 글을 앞으로도 쭉 쓰고 싶어요.
Q. 2W매거진에 기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글동무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번역을 하면서 마감이 있는 글쓰기의 힘을 알기도 했고요. 오래 혼자 글을 써온 내향적인 인간이 글을 통해 더 넓은 세상과 만나는 중입니다.
Q. 에세이 쓰기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 그리고 나 혼자 투머치 토커인 건 아닌가 하는 걱정. 그 두 가지를 주머니에 넣고 호두알 굴리듯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에세이 쓰기 같아요.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설렘과 걱정을 따글따글 굴려가며 부지런히 써볼 생각입니다.
Q.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철 모르는 어린애처럼, 재밌다 싶으면 우선 뛰어들고 보는 아이들처럼,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글쓰기를 실험해 보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줄줄 딸려 나오겠죠. 그렇게 새로운 나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필진들의 추천사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발리 우붓! 야자나무 아래 뜨거운 열기 속에서! 낯선 여행자들과 살사와 바차타를! 상상만 해도 환상적이다. 춤에 홀딱 빠져 지냈던 작가의 경험담은 독자들을 가슴을 뜨겁게 울리기 충분했다. 해보고 싶을 땐, 그냥 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뜨거워질 수 있다는 명제를 아주 오랜만에 떠올려 본다."
"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그녀의 몸짓에서 느껴지는 열정은 그 춤을 본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느끼지 않았을까. 비록 나는 활자로 그 열정을 느껴야했지만. 그녀가 춤을 춘 무대에 조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건 모를 일이지만 조명이 필요 없을 만큼 그녀는 원투쓰리 순간은 화려하고 돋보였을 것 같다. 언젠가 다시 발리를 가게 되면 우붓에서 그녀의 열정을 한 번 쫓아보고 싶어진다."
"작가님 글을 읽고 잠시 내 안의 장작을, 열정을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기가 또 올까 생각했어요. 활활 타기에 나이같은건 중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 좋은 문장을 만나면 괜히 반가워지고, 메모장에 기록해두고, 리뷰앞에선 소심해지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짧은 리뷰를 남겨보고픈걸 보면 장작이... 아직은 있나봅니다. 덕분에 감사해요."
"'그래! 한 번 해보지 뭐!'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해보지 뭐! 되든 안 되든. 안 되면 말고, 같은 말들. 그런 마음들. 언제부턴가 진짜 그렇게 툭, 내뱉으며 뭐라도 시작하고 있다. 아리 작가의 말처럼 그렇게 '한 발짝' 덕분에 우리는 뜨거웠던 한 시절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다시 '한 발짝' 내디뎌 뜨거운 순간으로 걸어가게 되는 건 아닐까."
위 작품은 2W매거진 14호 <내 생의 뜨거운 순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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