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W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아미 Oct 22. 2021

악의를 이겨내는 방법에 대하여_나비

2W매거진 16호 <같이 읽어요> 이달의 에세이 선정작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16호 <같이 읽어요>편에 나비 님의 '악의를 이겨내는 방법에 대하여'가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정세랑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독한 악의에 절망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세상에 분명 선의가 있다는 
따스한 믿음이 기운을 북돋워 준다.





요즘 악의(惡意)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주로 악성 민원인의 전화를 끊고 난 다음이다. 모든 민원인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전화 받는 사람을 모욕한다. 며칠 전 나에게 전화했던 민원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회사 다른 여자 직원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직원은 업무 처리가 아주 능숙하고 빠르더라. 그런데 너는 왜 업무를 그딴 식으로밖에 못하니?”

“내가 널 딸처럼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나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내가 말하는 걸 잘 좀 들어봐. 너희 부모님이 널 그렇게 키웠니?”

“너희 이사 이름하고 전화번호 다 알아 놨어. 아니다, 바로 사장한테 찾아갈 테니 그렇게 알아.”


각종 협박을 삼십 분 남짓 들으니 진이 빠졌다. 누가 나를 주먹으로 때린 게 아닌데도,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할까 하는 모멸감과 민원인이 퍼부은 악의에 대한 분노로 마음이 꽉 차 있었다. 세상에서 친절이나 배려 따위는 모두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온전치 않은 마음 상태로 집에 가면, 아이들을 안정적으로 돌보기가 힘들다. 예전에 악성 민원인에게 시달린 후 아무 처치 없이 집에 갔던 날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했던 사소한 실수에도 격하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고, 잠들기 전까지 다섯 번 넘게 울었다.


그때 나는 느꼈다. 마음에 응급처치하고 집에 가야겠구나. 하지만 아이들 하원을 담당해주시는 부모님과 바통 터치를 해야 했기에 집에 도착하는 시각을 늦출 수는 없었다.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본 끝에 나는 ‘특별한’ 책을 보는 방법을 택했다. 이 ‘특별한’ 책 중에 2W매거진 10월 호 주제로 선택한 ⟪시선으로부터,⟫가 있다.


정세랑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주인공 시선과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심시선 여사의 사후 10주기를 맞아, 가족들 모두 하와이에 모여 처음으로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에는 내가 사랑하는 요소가 정말 많다. 전통적인 제사 음식 대신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을 수집하여 제사상을 차린다는 계획부터 마음에 쏙 든다. 디제이(DJ)·고고학자·광고회사 이사·크리쳐 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도 매력적이다.


나는 다채롭게 반짝이는 등장인물 중에서도 애방과 지수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특히 좋아한다. 내가 ‘특별한’ 책이 필요할 때마다 펼치는 장면이기도 하다.


애방은 시선이 유럽에 머물 당시 만난 친구다. 당시 시선은 유명 화가인 마티어스 마우어의 집에서 학대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우어는 시선에게 붓 정리부터 쥐약 놓기까지 온갖 잡일을 시켰고, 욕설을 퍼부으며 물건을 던졌다. 시선의 전시회에 걸린 그림을 모두 사서, 파티에서 불태우고 찢으며 조롱했다. 시선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은 시선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시선의 배신으로 상처받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버렸다.


시선은 마우어의 지독한 악의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의 곁에는 친구 애방이 있었다. 애방은 “재능 있는 화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아시아 마녀”(P.178)라며 비난받는 시선을 자기 집에 숨겼다. 그리고 자신의 재력과 인맥을 활용해 귀국한 시선을 한국 예술계에 안착시켰다.


지수와 우윤은 둘 다 시선의 손녀로 사촌 관계다. 우윤은 어릴 때 많이 아팠다. 대학병원을 꽤 오랫동안 오갔다. 질병의 고통에 희망을 놓고 싶었을 때, 우윤의 삶에 지수가 걸어 들어왔다. 지수는 우윤과 디즈니월드에 가기로 허락받았다며, 매주 찾아와 같이 계획을 짰다. 어떤 놀이기구를 먼저 탈 것인지,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는 어디서 볼 것인지에 대해 노트에 꼼꼼히 적었다. 매주 찾아왔던 지수 덕분에 우윤은 외롭고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지수가 오지 않는 날에는 노트를 보면서 질병의 고통을 견뎠다. 이제 스무 살이 넘은 우윤은 “언니가 나를 구했지.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했지.”(P.148)라고 회상한다.


시선에 대한 애방의 선의는 타지에서 만난 고국 사람에 대한 친절 그 이상이었다. 귀국 시기를 늦춰가며 시선의 목숨을 구했고 “일종의 매니저처럼 커리어를 만들어냈다.”(P.180) 우윤에 대한 지수의 선의도 마찬가지였다. 지수는 평소 계획적이거나 주도면밀한 구석이 없다. 그때의 노력은 오직 우윤을 살리기 위한 선의로 짜낸 예외적인 노력이었다.


내가 현실에서 마주치는 사나운 악의에는 끈적끈적한 속성이 있는지, 한 번 마음에 엉겨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재빨리 이 ‘특별한’ 책을 펼치고 애방과 지수를 부른다. 내가 만약 시선과 우윤이었다면 애방과 지수가 나에게 베풀었을 선의를 상상한다.


악의를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내 앞에 애방이 웃으며 멈춰서는 모습을 그려본다. 비스듬히 모자를 쓰고 눈을 반짝이는 당당하고 멋스러운 여인. 애방은 나에게 손을 내민다. 그 단단한 손에서 내가 아끼는 당신을 위해서 아낌없이 베풀겠다는 따듯함이 느껴진다.


애방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고 나면, 내 앞에는 지수가 있다. 넘치는 에너지와 섬세한 배려심을 동시에 가진 그는 나와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음악을 틀어준다. 어쩌면 다음 공연에 디제잉할 리스트를 나에게만 몰래 먼저 들려줄지도 모른다. 지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에게도 어느새 그의 밝은 에너지가 전해진다.


⟪시선으로부터,⟫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독한 악의에 절망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세상에 분명 선의가 있다는 따스한 믿음이 기운을 북돋워 준다. 지하철이 집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회사를 나설 때보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나는 ‘특별한’ 책에 도움을 받아 악의에 지지 않으려 애쓴다.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331


시선의 가족들은 시선이 남기고 간 조각을 되새기며 제사를 마친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내 안에도 정세랑 작가가 남긴 조각이 있음을 느낀다. 세상이 악의로만 가득 차 있는 게 아니라는 희망, 그저 선의로 친밀감을 표시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는 믿음. 독한 악의가 쏟아지는 순간에도 내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런 아름다움이다.



글_나비

보고 읽고 쓰는 나비입니다. 익숙한 질서에 물음표를 던지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상상합니다. 






[Mini Interview] 나비 작가


"차별 받는 모두와 연대하고 싶어요"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나비입니다. 읽고, 보고, 몸으로 겪은 삶의 조각들을 글로 남겨요. 6살 4살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13년 차 회사원이에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행동하려고 노력하며 삽니다.


Q. 2W매거진에 기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글 쓰는 여성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한다는데 마음이 끌렸어요.  유명한 정치인이나 기업인, 석학은 거의 다 남성이에요.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이 능력을 펼칠 기회가 적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사적인 영역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여성들이 월경이나 성적 욕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건 금기시되어 왔죠. 이처럼 여성들에게는 지금까지 더 적은 기회와 더 적은 발언권이 주어져 왔어요. 저는 여성들에게 더 많은 마이크를 준다는 2W매거진의 취지에 매우 공감했고, 투고하게 되었습니다.


Q. 에세이 쓰기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저는 매달 발행되는 2W매거진에는 에세이를 기고하고, 분기별로 발간하는 페미니즘 웹진 <아주마스>에는 서평을 쓰고 있는데요. 모든 글쓰기가 몹시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둘 다 마감이 있는 글쓰기라 더 괴롭고요. 기쁨의 측면에서는... 글이 마음에 들게 완성되었을 때 가장 행복해요!


Q.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세상에는 여러 취향과 정체성이 있는데, 사회는 종종 다수와 다른 사람을 '틀리다'라고 이름 붙여요. 제 안에도 고정관념과 편견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데요. 편협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는 저를 알아채고 나서, 차별과 혐오를 줄이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온라인 강의도 듣고, 줌으로 모임도 하고요.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틀리다'라고 차별받는 모두와 연대하고 싶어요. 이런 내용을 쉽고 잘 읽히게 쓰는 게 저 나름의 목표입니다.




필진들의 추천사


"나비 작가는 악성 민원인의 전화를 끊고 난 뒤 악의(惡意)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직장에서 상처받은 마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작가는 책을 읽는다. 그렇게 만난 책은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였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독한 악의에 절망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진다(같은 책)'고. 책이 주는 위로는 얼마나 큰가. 나비 작가의 글을 읽으며 생각한다."


"힘들게 일하고 그 마음을 억누르는 방법으로 책을 선택했고,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희망과 친절을 믿게 되고 다시 자기 일에서 기운을 찾고 노력하는 모습이 느껴져서 나비님의 글 좋았어요. 아픔이 묘하게 느껴지면서도 독서가 가진 순기능을 느낄 수 있어 기억에 남았어요."


"나비 님의 <악의를 이겨내는 방법에 대하여>를 보면서 참 공감이 되었던 게 저 역시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책으로 구원받은 경험이 떠올라서였던 것 같아요. 아프지 않기 위해 복용하는 알약 같다는 생각을 하며 스트레스 받는 일상 속에서 꾸역꾸역 책을 읽던 기억. 어떤 책들은 그런 치유의 역할을 하죠."






위 작품은 2W매거진 16호 <같이 읽어요>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매달 다른 주제로 발간되는 2W매거진의 정가는 1000원이며 ONLY 이북으로만 발행됩니다. 시중 인터넷 서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판매 수익금은 전액  글 쓰는 여성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데 사용됩니다. 한 달 1000원으로 여성 작가들의 꿈을 응원해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_목요일 그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