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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Mar 23. 2022

드므, 나의 이름에게

2W매거진 21호 <나의 이름에게> 이달의 에세이 선정작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21호 <나의 이름에게>  편에 드므 작가의 '드므, 나의 이름에게'가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름은 남이 불러줘서 제 이름인 줄 안다.
내가 스스로 붙인 이 이름은
내게 호칭(互稱)이 아니다.
이름을 거울로 삼았다.
그 누가 불러주지 않대도 서운하지 않다.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간다. 봄꽃이 하나씩 피는 덕수궁 안에 내 필명이 있다. 덕수궁에 들어서니 새삼 반갑다. 아직 겨울 끝자락이라서 봄꽃은 기미가 없어 조금은 아쉽다. 작년에는 덕수궁 현대미술관 전시를 보러 왔다가 예상치 못한 꽃구경을 했었다. 그날은 막 비가 지나간 뒤였기에, 궁궐에는 젖은 흙냄새가 풍겼었다. 물기 먹은 봄꽃은 저마다의 색을 터뜨려서 봄의 기운이 선명한 날이었다. 병실 밖에서 봄을 마주할 수 있었던 그날의 기쁨을 글자로 적어냈다. 그게 벌써 열두 달 전의 일이었다.


내 필명은 ‘드므’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의 사방 모서리에 이 물체가 있다. 처음 드므를 봤을 때, 이름도 낯설었고 그게 무엇인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크고 넓적한 항아리처럼 보였다. 색은 항아리처럼 갈색이었지만, 우리가 아는 옹기와 닮지는 않았다. 오히려 큰 솥단지와 닮았다. 옆에 섰더니 그 키는 내 무릎보다 살짝 높게 올라왔다. 그 둘레는 내가 양팔로 안아도 한 번에 안을 수 없을 만큼 제법 넓었다. 그 위에는 투명한 아크릴판이 뚜껑처럼 덮여 있었고, 하얀 글씨로 이 물체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독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궁궐에서 주요 건물의 월대와 그 마당에 드므를 설치하고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드므에 담긴 물에는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다시 찾은 드므는 여전했다. 그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고 그저 묵묵히 네 모서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중화전은 대한제국 시대에 고종이 거처하기 위해 만든 궁이라고 들었다. 백 년 넘었을 이 독은 어떤 화마들을 물리쳤을까. 찬찬히 보니 드므에는 한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萬(일만 만), 壽(목숨 수), 喜(기쁠 희), 歲(해 세). 바꿔 말하자면 ‘Long live’와 ‘Happy years’ 정도가 되려나. 커다란 독 주변을 쳐다보고, 사진도 찍고, 한 바퀴 돌아가면서 살피고 있으니, 한 무리의 가족이 관심을 가지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자리를 내어주면서, 다른 모서리에 있는 드므를 구경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지 않은 걸음걸이로 천천히, 쉬엄쉬엄 하나, 둘, 셋, 넷. 여기 중화전에는 드므가 총 네 개였다. 작년에는 그 이름과 역할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놀라워서 몇 개인지 셀 생각도 못 했다. 중화전의 사방을 지키느라 네 개인 것을 이제 알았다. 시간을 두고 다시 드므를 보니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동안 내 이름이 되어준 ‘드므’는 내게 정말로 어떤 의미였을까.


“언젠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너를 되돌아봐야 하는 때가 올 거야. 그때 처음 너의 필명이 너를 잡아줄 거야.”

최근 필명에 대해서 고민했을 때, 내게 친구가 했던 말이다. 필명을 짓던 즈음의 나는 내 삶에 병이 오고, 괴로움이 오고, 미칠 것 같은 슬픔이 오던 일련의 그 모든 일을 화마라고 여겼다. 물이 담긴 드므처럼, 내 삶에 나쁜 것을 쫓아낼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의 나는 2W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잠잠한 물이 잠겨 있을 큰 독, 그곳에서 저 자신을 자주 들여다보고 싶어요. 자주 움찔대는 마음속의 화마가 나타나지 않게끔 글로써 나를 바로 세우고 싶어요. 바로 선 채로 나 자신을 잊지 않으면 어두운 곳에서도 밝은 것을 볼 수 있다고 믿어요.”

이름 덕인지, 화마는 아직 내게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행스럽게도 글을 계속 쓸 수 있다. 드므를 내 이름으로 만들어 놓고서, 나는 내 속을 깊은 우물 보듯이 들여다본다. 속을 살피는 것은 나 자신을 잊지 않으려는 다짐이기도 하다.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순간에도 드므는 우직하게 그곳에 있었다. 그 자리에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내 필명은 나를 지켜내고 있다. 이름은 남이 불러줘서 제 이름인 줄 안다. 내가 스스로 붙인 이 이름은 내게 호칭(互稱)이 아니다. 이름을 거울로 삼았다. 그 누가 불러주지 않대도 서운하지 않다. 옛집 아궁이를 지켜내는 오래된 솥 같은 그 모양새로 내 안에 들어차서 묵묵히 내 중심을 잡아준다. 내가 고개 떨구거나, 지쳐 쓰러질 때 나를 지켜줄 이름이란 것을 안다.

드므를 바라본다. 내가 부르는 내 이름이 여기 있다. 백 년을 지나오느라 빛바랜 주물이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그 몸에 새겨진 한자를 눈으로 눌러 담는다.


만(萬), 수(壽), 희(喜), 세(歲).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읽어본다. ‘계속해서 살고, 기쁘게 나이 먹어라’. 중화전의 호화로운 단청이 우리를 안듯이 날개를 펴든다. 찰칵. 사진에 드므가 참 잘 나왔다.


글_드므

목구멍에 티끌이 걸린 듯 꺼끌꺼끌할 때에는 글자를 찾고 단어를 더듬어 내 상황과 감정을 아로새깁니다. 궁궐 목조 건물을 상징적으로 지켜주는 물동이 ‘드므’, 그 이름처럼 마음속 화마를 몰아내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글을 씁니다. 나아갈 생의 순간들을 감정 넘치지 않게 온전히 풀어내고자 합니다.

https://www.instagram.com/deu__meu  





[Mini Interview] 드므


"나의 오롯한 시선을 담아, 결이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Q. 지난해 4월에 이어 2W 매거진에서 두 번이나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되었어요. 축하드립니다. 소감 말씀 부탁드려요

2W 필진을 비롯하여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글의 시작 지점을 되돌아보게 되네요. 작년 4월에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된 <땅, 꽃, 셋>은 친구들과 벚꽃을 만끽했던 순간을 회상하는 이야기였는데요. 제가 사랑하는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 시작도 없었을 거예요. 애칭으로 소개하자면, ‘도’ 님과 ‘솔’ 님인데요. 제게는 친정 식구와 다름없는 존재예요. 둘 다 예술 분야 전공이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섬세하면서도 무언가의 본질을 잘 꿰뚫어 보는 편이에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계속 보는 사이인데, 매번 제가 많이 배워요. 그러고 보니, 그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 했었네요.  “도미솔! 우리 셋이 있던 자리가 내 글의 시작점이야. 진짜, 정말, 많이, 엄청나게 고마워! 우리 계속 잘 크자! 올해 벚꽃도 보러 가자!”


Q. 첫 기고 이래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달 꾸준히 2W 매거진에 기고하고 계세요. 주제가 어렵거나 바쁠 때도 있었을 텐데 100% 투고가 어떻게 가능한지 넘 궁금해요. 비결이 있나요?

매달 발표되는 주제를 ‘나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좀 쉽게 느껴져요. 최근 들어서 성인 대상의 마음 관리 학습지나 워크북이 많이 나오던데요. ‘나’를 깊게 파볼 수 있는 심화 과정이라고 생각해보는 거죠. 예를 들어서 주제가 ‘반려’일 때는 이렇게 저 자신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반려’를 ‘짝이 되는 동무’라고 하는데, 너는 무슨 얘기를 쓰고 싶어? 반려 식물? 반려동물?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뭐가 있었지? 그 일을 왜 말하고 싶어…?”

이렇게 저 스스로 자꾸 질문을 던져요. 양치하다가, 길을 걷다가, 잠들기 전 등등 문득 떠오르는 답은 언제고 메모를 해두고요. 계속 질문해 나가면서, 지나간 경험과 기억 안에서 그 답을 찾는 과정인 셈이죠. 이렇게 글감이 모이면 메모에 살을 붙여나가며 글을 써요. 그러면 시간이 후딱 가고 마감일이 되더라고요. 나도 모르던 나를, 내가 찾아서 꺼내 보는 과정이랄까. 써내지 못할 것 같은 어려운 주제들도 계속 끈질기게 질문하면 어느 순간에,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이 팟! 답이 나오더라고요.


Q. 작가님께 '마감'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절실함’을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 자신을 소위 ‘무쓸모(無用)’의 인간으로 여기던 때가 있었어요. 딱 일 년 전, 저는 바닥에 있었어요.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도요. 사실 바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뭐라도 해보자. 내 게으름에 지지 말자.’

이 마음으로 투고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필명이라고 해도, 아무렇게나 대충 쓸 수는 없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저는 마감일까지 거의 매일 수정해요. 퇴고(推敲)라고 하죠. 당나라 때 ‘가도’라는 시인이 문을 ‘두드리다’로 할지, ‘밀다’로 할지를 고민했다는 말에서 온 단어이기도 한데요. 마지막까지 단어와 문장을 이리저리 바꿔봐요. 계속 고치다 보면 ‘아, 더는 못해.’라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와요. 그때 파일을 저장하고 메일을 보냅니다. 언제나 100% 흡족한 마음으로 마감하지는 못해요. 떨떠름하지만 마감일이 왔으니 제출하는 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게 ‘마감’이란, 퇴고를 절실하게 반복하다가 ‘떨떠름하게 제출하는 시간’으로 말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이 ‘마감’ 덕분에 저는 글을 쓰고나서 어떻게든 완성하는 힘을 단련할 수 있었으니까, -사람으로 치자면- 은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웃음)


Q. 이번에 투데이신문 직장인 신춘문예 수필로 등단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앞으로 수필가로서 어떻게 활동해나갈 계획이신지 궁금해요.

오늘 본 반짝이는 나뭇잎이 어떤 빛깔이었는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렇기에 일 년을 하루씩 낱개로 떼어서 살아가는 마음이 무엇인지…, 이런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수필’이라는 장르를 알게 되어서 좋은 점은, 일상의 순간을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얼마든지 더 큰 의미를 발견해 낼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요. 그 시선을 담아서 결이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책을 덮은 후에도 차의 향처럼 여운이 깊게 남는 글을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고요. 오래도록 쓰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저의 긴 수다를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필진들의 추천사

- 드므라는 필명처럼 작가님이 더 이상은 나쁜 일을 겪지 않고 좋은 글을 계속 써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피는 것은 건강을 살핀다는 뜻도 되고 내 안의 깊은 마음도 살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를 돌보는 삶만큼 소중한 가치관도 없는 것 같다. 작가님의 필명도 가슴에 새긴다.


- 물건이 가진 쓰임새에서도 의미를 찾아 자신의 삶에 힘을 준 드므님의 글은 내게 감동을 주었다. ‘물이 담긴 드므처럼, 내 삶에 나쁜 것을 쫓아낼 힘이 필요했다.’, ‘이름은 남이 불러줘서 제 이름인 줄 안다. 내가 스스로 붙인 내 이름은 내게 호칭(互稱)이 아니다. 이름을 거울로 삼았다. 그 누가 불러주지 않대도 서운하지 않다.’ ‘이름을 거울로 삼았다.’는 문장에서 드므님의 의지와 강함이 느껴진다.


- 개인적으로 드므작가님의 글을 좋아한다. 이런 팬심을 갖는 이유는, 여러 번 읽게 하고 또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깊이로 자리잡는 작가님의 간결한 문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궁궐이라면, 개인적인 경회루의 추억이 먼저이다. 앞으로 궁궐에 간다면 드므를 유심히 보게될 듯하다.




*이 글은 2W매거진  21호 <나의 이름에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매거진 정가는 3000원이며 수익금은 여성들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응원하는 데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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