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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Nov 27. 2022

인생이여 만세 _나비

2W매거진 29호 <여자의 남자> 이달의 에세이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29호 <여자의 남자>  편에 나비 작가의 '인생이여 만세'이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네가 지금 이직 준비 중인 회사에
그 사진을 뿌리겠다고.
그 사진? 하고 되묻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처음 손잡았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날 너는 야근을 마친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내리려는데, 네가 내 왼손을 잠시 잡았다 놓았다. 두근거리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너를 보내고 혼자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 동안 너의 온기가 머물렀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바라보기만 해도 조심히 들어가라던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와 함께 갔던 카페도 기억한다. 우리가 자주 갔던 카페는 빽빽한 건물 사이 3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삭막한 도심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 가져온 듯한 온갖 양탄자의 알록달록한 무늬와 이국적인 향초의 내음이 감각을 사로잡았다. 그곳에서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너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긴 속눈썹을 천천히 내 눈에 담았다.


우리가 조금씩 몸으로 가까워지던 시기에, 우리는 공원 주차장에도 자주 갔다. 밤늦은 겨울이었고 공원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옅은 안개가 드리운 넓은 주차장을 돌아다니며 오늘은 어디 세울까 즐겁게 고민했다. 언젠가 너와 숨을 나누다가 차 유리가 온통 희뿌옇게 변해서, 우리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 같지 않냐고 쿡쿡거리고 웃었던 날도 기억한다.


나는 너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맥 모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았다. 우리는 항상 베이컨에그 맥 모닝과 아메리카노 세트를 시켰다. 스미노프 위스키에 토닉워터와 크랜베리 주스를 섞어 마실 수 있다는 것도 너에게 배웠다. 달콤하면서도 시원하고 쌉싸름한 그 맛을 나는 아직도 좋아한다. 너는 던힐 1mg을 피웠고,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도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모든 순간 나와 연결되고 싶어 했다. 내 핸드폰에 남자인 친구들의 연락처가 있는 것을 싫어했고, 취미로 동호회 활동을 해보겠다는 것을 반대했다. 네가 만나자고 할 때를 위해 나는 늘 대기했다. 네가 원하는 내 모습이 되기 위해 나는 늘 노력해야 했고, 내 취향보다는 너의 취향이 먼저였다. 나는 점점 숨이 막혔다. 어쩌면 연결이 아니라 집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우리가 1년 넘게 만났을 때 나는 너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하지만 너는 내 말을 조금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너는 사무실에 있던 나를 불러내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 두 시간씩 내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네가 출장을 가 있을 때는 틈날 때마다 나에게 전화했다. 나는 통화가 길어질 때마다 건물 1층의 빈 공간을 찾았다. 대리석 바닥의 격자무늬를 따라 돌며 너의 분노와 슬픔과 울먹임을 들었다. 나는 긴 통화를 할 때 여전히 원을 그리며 걷는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난하게 흘렀다. 나는 헤어질 마음이 완전히 굳어졌고, 너는 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차로 나를 집에 데려다주던 그날, 너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에게 말했다. 네가 지금 이직 준비 중인 회사에 그 사진을 뿌리겠다고. 그 사진? 하고 되묻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 네가 나한테 보내줬던 사진 있잖아. 네 몸이 나와 있는 그 사진.


눈앞이 아득해졌다. 숨을 섞으면서 너에게 더욱 깊이 빠져들던 시기에 나는 너에게 사진을 보냈다. 해외 출장을 갔던 네가 외롭다는 말에, 보고 싶다는 말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는 말에 몇 번이고 거절하다가 마음이 약해져서 사진을 보냈다. 그렇게 보냈던 사진을 가지고 너는 나를 협박했다. 당시는 성폭력처벌법 개정 전이라 촬영물에 관한 협박을 처벌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퇴근하면 부모님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잘 시간이 되어 방의 불을 끄고 나면 몰래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백팔 배를 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너의 말에서 잠시라도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절을 하고 있으면 이불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처음부터 답이 없었다. 매일 절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나는 나를 찾아왔던 너에게 말했다. 그래, 오빠 마음대로 해. 회사에 뿌리든, 알아서 해.


너는 나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 도리어 너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며 나에게 물었다. 왜 그래, 그러지 마.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속은 말라붙고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껍데기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에게 조금도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 껍데기는 단지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너를 사랑했는데, 도대체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을까.


그 후로도 나는 십 년 넘게 SNS 프로필에 풍경 사진만 걸어 놓았다. 이름도 본명으로 검색할 수 없도록 바꿨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가 둘 생긴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무서웠다. 내 사진을 들고 있는 네가 언제라도 내 삶을 산산조각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언제든 내가 창녀라고 손가락질당할 것 같아서. 나는 내가 나임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올해 여름이 되어서야 나는 삶이 무너질 것 같다는 공포를 내려놓았다. 몇 년 동안의 글쓰기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고만 해도 악몽을 꿨다. 꿈에서 나는 자고 있었는데 크고 검은 그림자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래도 곁에서 응원을 보내준 글쓰기 동료들이 있었기에 나는 계속 기억을 꺼내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나들이를 가고 있었다. 남편이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를 틀었다. 그가 말했다. 이 노래를 회사 사람들과 같이 맥줏집에서 신청해서 들었는데, 전주만 들어도 저절로 흥겨워진다고. 나는 이 노래를 너와 처음 들었다. 너도 나에게 똑같이 말했었다. 전주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오랫동안 이 노래만 들으면 네가 떠올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래도 이제는 남편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더는 범죄가 나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증오했지만 동시에 사랑했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Viva La Vida’는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이라고 한다. 콜드플레이 멤버가 이 노래를 매일매일 실수를 거듭하다가 죽게 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내가 했던 건 실수였다. 그리고 실수임을 받아들이게 된 나는, 이제 인생이여 만세라고 노래를 부른다.



글_ 나비

보고 읽고 쓰는 나비입니다. 익숙한 질서에 물음표를 던지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상상합니다.

블로그 https://www.blog.naver.com/shouly220   

인스다그램 https://www.instagram.com/nabi_eylee 






[Mini Interview] 나비


"꾸준한 기록들이 제 삶을 풍성하고 다채롭게 가꿔준다고 믿어요"



Q. 지난해에 이어 2W 매거진에서 두 번이나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되었어요. 축하드립니다. 소감 말씀 부탁드려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작년 10월 이달의 에세이에 선정되었을 때의 기쁨이 지금도 생생해요. <악의를 이겨내는 방법에 대하여>는 악성 민원인의 전화에 머리카락이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 받다가 쓴 글이었어요. 이번에 뽑아주신 <인생이여 만세>는 제가 데이트 폭력을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다가, 2년 전부터 조금씩 글로 적기 시작했어요. 여러 번 괴로운 기억을 마주했더니, 이제는 제가 그 사람을 증오했지만 사랑했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힘든 시간들이 조각조각 모여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된 거예요. 기쁨이 두 배로 다가옵니다.

Q. 2년 넘게 꾸준히 2W매거진과 함께 글쓰기를 해오셨어요. 어떤 동기부여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글이 쌓이는 즐거움을 꼽고 싶어요. 마감이 있는 글쓰기는 분명 고통스러워요. 어떤 내용을 쓰고 싶은지 잘 떠오르지 않는 주제도 많았고요. 아이들 재우면서도 자주 고민해요. 어떤 날은 노트북을 가지고 출근길 버스에서 쓸 때도 있어요. 그러다 결국 한 편을 써냈을 때 저에게는 성취감이 무척 커요. 지나고 나면 열 편이 되고, 언젠가는 백 편이 되겠죠. 이 꾸준한 기록들이 제 삶을 풍성하고 다채롭게 가꿔준다고 믿어요.

Q. 2W매거진 외에도 블로그에 서평도 열심히 쓰시고 <웹진 아주마스> 등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하시는 걸로 압니다. 왕성한 필력의 노하우가 있을까요?
2018년 가을부터 글을 썼는데요. 그때는 자기 검열이 심해서 제 안에 억눌려있던 이야기를 잘 꺼내지 못했어요. 계속 읽고 쓰다 보니, 올해 들어 목소리들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 같아요. 제 몸에 켜켜이 쌓여 있던 외로움, 슬픔, 두려움, 비겁함과 관련된 것들이요. 책에서 에너지를 많이 얻는데요. 읽다 보면 어지럽게 부유하던 감정들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는 느낌이 들어요. 작가님들의 글에 힘을 얻어, 제 자신을 마주하고 글로 옮겨보는 작업을 좋아해요.

Q. 글 쓰는 사람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다짐이 있다면?
무엇보다 질리지 않고 써보려고 해요. 글쓰기 시작한 지 4년이 넘었는데 물리지 않았으니,(웃음)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2W매거진과 <웹진 아주마스> 둘 다 꾸준히 이어나가고 싶어요. 그리고 나만 옳다는 주장에 빠지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제가 아는 범위는 몹시 좁으니까요. 자기 자신이기에 차별받는 삶들에 대해, 내 사정만 생각하면서 눈 돌리고 싶지 않아요. 타인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언제나 감각하면서 쓰려고 해요. 앞으로도 꾸준히 읽고 쓰는 나비가 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진들의 추천사



당시엔 얼마나 고립되고 외롭고 무서웠을지 상상이 가질 않지만, 그날의 상처를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며 나아가는 작가님이 얼마나 멋있는지 모른다. 나도 함께 만세! 부르고 싶다!


그가 사진을 뿌리지 않음에 나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왜 늘 우리만 가슴 졸이며 살아야하는건지. 그래도 이제 나도 알고 작가님도 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인생이여 만세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정말 다행이다. 


나비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인생이여 만세!'라고 노래 부르는 작가님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 글 속에 등장하는 남자는 나쁜, 아니 아주 악질이다. 그러나 결국 무너지지 않고,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고, 그럼에도 나의 인생은 만세,라고 외칠 수 있는 작가님 마지막 문장이 너무 좋았다. 아 정말 만세다!


2W 매거진을 오랫동안 읽다 보니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 나비 님이 그런 경우다. 이번 글 '인생이여 만세'를 읽으면서 한 명의 팬으로 속상하기도 했고, 또 이 여자 좀 멋진데 싶기도 했다.  글쓰기를 통해 공포에서 벗어난 것도,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비 님 응원합니다. 








                    



*이 글은 2W매거진  29호 <여자의 남자>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매거진 정가는 3000원이며 수익금은 여성들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응원하는 데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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