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엔테라레이나에서 에스떼야까지 22km
Today’s route ★★★☆☆
푸엔테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 → 에스떼야 Estella 22km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새벽에 좀 추워서 깨긴 했지만 잠도 잘 잔 편이었다. 더 잘 수 있었다면 더 오래 자고 싶었다. 6시에 강제로 불이 켜지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좀 더 뭉그적거리다가 6시 반쯤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전날 마트에서 사둔 엠빠나다와 오렌지주스로 아침을 먹고, 남편과 영상통화를 했다. 그렇게 느릿느릿 채비를 하다 보니 어느덧 8시였다. 여유를 부리다 보니 알베르게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게으른 순례자가 되어 있었다. 아무려나.
오늘은 오랜만에 화창했다. 기분 좋은 아침햇살과 신선한 공기에 기분이 좋았다. 어젯밤에 뒤틀리는 듯이 아팠던 오른쪽 종아리도 아침이 되니 한결 나아졌다. 낮에 걸을 때는 기분이 고양된 상태라 그런지 딱히 아픈 곳도 느끼지 못하고 즐겁게 걷게 된다. 다 걷고 나서 숙소 체크인하면 그때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참 신기하지.
오늘의 미션은 쉴 수 있을 때 푹 쉬며 천천히 걷기. 오늘 만나는 모든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맘먹었다. 이 여정을 내 몸이 무리라고 느끼지 않게 살살 달래가면서 걷기 위함이다. 나들이하듯이 가볍게. 라고 하기엔 20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하지만.
한 시간쯤 걷자 나타난 마을, 마녜루. 작은 바에 들어갔다.
“올라. 운 카페 솔로 그란데. 뽀르파보르.(안녕하세요. 블랙커피 큰 사이즈 한 반 주세요)”
이제야 나의 커피루틴을 좀 찾은 것 같다. 배고프고 추울 때는 카페꼰레체(카페라떼), 아침에 카페인이 필요할 때는 카페솔로(에스프레소), 양이 좀 아쉬울 때는 거기에 ‘그란데(양 많이)’만 더해주면 된다. 그러면 그게 우리가 아는 아메리카노다. 더워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간절할 때는 ‘꼰 이엘로(얼음도 함께 주세요)’라고 하면 따로 컵에 얼음을 담아주니 거기에 커피를 넣어서 제조해 마시면 된다. 카페 메뉴엔 아이스커피가 없고, 얼음은 서비스 개념이라 돈을 따로 받지 않는다. 당연히 없을 수도 있다. 신기한 건 카페솔로든, 카페꼰레체든, 거기에 얼음을 추가하든 모두 같거나 비슷한 가격이라는 점.
이곳은 아메리카노는 1.4유로. 한국 돈 2천 원에 커피도 마시고, 아픈 다리도 쉬고, 화장실도 해결하고, 까미노에서 바르의 존재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다음 마을 시라우끼. 여기도 꽤 괜찮아 보이는 바르가 몇 군데 있었으나 방금 전에 커피를 마셨으므로 나무그늘아래 예쁜 벤치에 자리 잡고 쉬기로 했다. 비가 오지 않는 화창한 날에는 야외에서도 충분히 쉴 수 있는 데가 많다. 양말 벗고 발에 바람도 쐬어주고, 삶은 달걀 하나 꺼내 고추장 발라먹고. 햇살이 등을 따숩게 데워주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올라, 부엔 까미노’ 인사 건네는 것도 잊지 않고.
한 10~15분 쉬다가 다시 출발했다. 너무 예쁜 노상 바를 발견했다.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는데 앞에 어마어마한 유채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1유로 정도 내고 오렌지를 하나 가져와 그 자리에서 까먹었다. 스페인 오렌지의 상큼함은 우주 최강이다. 상처투성이 맨발을 까닥거리며 눈앞에 가득 펼쳐진 유채꽃밭을 바라보며 입안엔 상쾌한 과즙이 가득한 이 순간의 행복! 이럴 땐 혼자인 게 참으로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소리 내어 감탄하고 호들갑 떨고 싶을 때 혼자면 참 답답하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편에게라도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 시차가 멀어지면 이상하게 타이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다음 마을 로르까. 이제 반 정도 걸었을까. 로르까 정도 가니 날씨가 너무 더워지고 체력도 좀 떨어졌다. 로르까 한 바에 아이스커피라 한글로 쓰인 간판을 보고 홀린 듯 입장했다. 한국인 여자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어찌나 친절하고 열정적이시던지. 오랜만에 한국식 ‘아아’를 마시니 살 것 같았다. 쨍하게 시원한 맛은 역시 ‘아아’를 이길 수 있는 게 없다.
그다음 마지막 마을 빌라투에르타. 여기서도 바는 패스한 대신 또 벤치에서 쉬었다. 마지막 남은 달걀과 어제 마트에서 산 빵을 먹음. 이렇게 열심히 쉬었는데…..
너무 열심히 쉰 나머지 목적지인 에스테야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3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살짝 조바심이 났으나 공립알베르게에 들어가니 다행히 침대는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자원봉사자는 사무적이고 다소 불친절했으나, 체크인이 된다는 것만으로 난 기분이 좋았다. 고작 8유로에, 이렇게 깨끗한 잠자리(일회용 시트 포함)를 제공받다니. 게다가 1층!
오늘은 라나, H와 함께 셋이서 장을 보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H가 묵는 사립알베르게에 주방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가려고 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외부인은 출입금지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H 혼자 요리를 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H는 혼자 쉬고 싶어서 따로 사립 알베르게를 예약한 거였는데, 본의 아니게 성가시게 한 셈이 되었다.
라나와 나, 거기에 무진님이 합류해서 알베르게 뒤뜰 야외 테이블에서 맛난 식사를 함께했다. 꽤나 아늑하고 아름다운 뒤뜰이었다. 순례자들이 저마다 쉬거나, 책을 읽거나, 요가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물집이 생기는 것도 스트레스라 어떻게든 잘 달래 가며 오래 걸어야 했다. 22킬로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를 오는 동안 바 2번 포함 5번이나 유유자적 쉬었으니 오래 걸릴 만도 했다. 자주 쉰 덕분에 이날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미션은 성공이지만 발 상태는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면 샤워 후 안티푸라민 연고를 발과 종아리에 듬뿍 바르며 오래 마사지하는 게 중요 일과가 되었다. 발을 어루만지면서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대체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고.... 살면서 이렇게 내 발을 돌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
내가 내린 결론은 “정신과 육체의 밸런스가 안 맞아서”였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고양된 행복감에 어쩔 줄을 모르는 동안 내 몸의 상태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육체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정신을 좀 더 진정시켜야 한다. 캄다운… 그래야 끝까지 갈 수 있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de los Padres Reparadores ★★★☆☆
1박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