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떼야에서 로스아르코스까지 21km
Today’s route ★★☆☆☆
에스떼야 Estella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21km
오늘 걷는 길에는 조금 특별한 스팟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순례길을 검색할 때마다 자주 등장해 눈여겨보았던 스팟. 이라체 와인샘. 실제로는 샘이 아니라 수도꼭지지만, 수도꼭지만 틀면 공짜 와인이 펑펑 나온다니, 무슨 기적 같지 않은가.
전날 묵은 에스떼야 공립 알베르게는 참 좋은 환경이었다. 리모델링을 한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모든 시설이 새것이었고, 1층을 배정받아 편하게 잘 잤다. 탱탱한 매트리스와 숨이 죽지 않은 푹신한 베개만으로도 감사히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순례자가 되었다. 아침에는 전날 파스타를 만들고 남은 식재료로 샐러드를 만들어 라나를 나누어 먹었다. 그래도 어쨌든 잘 자고, 잘 먹고 좋은 컨디션으로 시작하는 하루, 날씨마저도 환상적이었다. 오늘은 이라체 와인샘에서 와인 한잔 마시면 그것만으로도 완벽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걸음이 빠른 라나를 먼저 보내고 나는 8시쯤 느긋하게 준비해 출발했다. 나는 한국인들에 비해서도 그렇고, 다른 순례자들 평균치에 비해서도 좀 느긋한 편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사실, ‘무사히 완주한다’는 목표 외에는 크게 조바심이 날 게 없었으므로. 컨디션을 조절해 가면서 이 아름다운 길을 최대치로 즐기는 것만이 나의 숙제인 셈이다.
조금 걷다 보니 엊그제 푸엔타라레이나에서 만났던 홍콩 여자애가 혼자 걸어가는 걸 발견했다. 이 친구와 처음 만났을 때 본인의 이름을 ‘지영’이라 소개하는 바람에 나는 다소 말투가 어눌한 한국 사람인줄로만 알았다. 약간 발음이 어눌한 것 외에는 거의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키도 작고 힘없고 소심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붙임성도 있고 호기심도 많은 친구.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함께 걷다가 걸음속도가 달라져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아예기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니 이라체 와이너리와 넓은 포도밭이 나타났다. 오 드디어 나왔구나. 수도꼭지만 틀면 와인이 콸콸콸 나온다는 전설의 그 와이너리. 순례자들을 위해 매일 100리터의 와인을 기부한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조금 길이 꼬이긴 했으나 무사히 와인 수도꼭지를 찾아 지영과 함께 한잔했다. 조개껍질을 씻어 잔으로 썼다. 세상에. 너무 맛있었다. 맛도 좋고, 가슴이 찌르르한 게…. 이 와인 한잔이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에게 기쁨과 에너지를 선사했을까. 와인을 따라 마시는 모든 순례자들의 얼굴에는 커다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즐기고 있는데 먼저 출발해 저만치 간 줄 알았던 라나가 뒤늦게 도착했다. 술을 좋아하는 라나는 아예 500ml짜리 물병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알고 보니 무릎 부상이 심한지 걸음이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내 무릎보호대 하나를 라나에게 빌려주었다. 무릎보호대를 착용하니 통증이 한결 나아져서 후에 얘기해 주기를 ‘그날 언니가 빌려준 무릎보호대와 걸으면서 홀짝홀짝 마신 와인 덕분에 순례길 시작한 이래로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어’라고 했다.
봄날이라 세상 어디나 꽃밭이지만, 이날의 길은 정말 예뻤다. 눈부시도록 화창한 날씨와 눈 닿는 곳마다 반짝이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자꾸만 내 맘을 간질였다. 마치 온 세상이 나에게 꽃다발을 바치는 것 같았다. 공짜 와인을 조금 마셔서 더 그렇게 느껴진 걸까. 어느 숲길에서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거실에나 있을 법한 카우치 하나가 길가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나는 배낭을 벗어젖히고 눕다시피 비스듬히 카우치에 앉아 귤을 두어 개 까먹었다. 마침 눈앞에는 자연다큐에 어울리는 멋진 산맥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앞을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제집인 듯 편히 카우치에 앉은 나를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지나갔다. 물론 나도 웃으며 “부엔 까미노”인사를 돌려주었다. 왜인지 이 길이 참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 날은 걷기 시작한 후로 3시간쯤 걷고 나서야 첫 번째 바 하나가 겨우 나왔고, 나는 늦은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 들렀다. 들어가니 앞서 출발했던 라나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거기 합류하고 조금 앉아 있으니 ‘지영’도 곧 들어와 합류했다. 조금 있다 라나는 오늘 숙소를 예약하지 않아서 서둘러야 할 것 같다며 먼저 출발했다. 지영은 다리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이 날은 여기까지만 걷고 버스로 다음 도시까지 점프할 생각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길을 걷고 있지만 저마다 참 다르게 걷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이 이토록 오래 사랑받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에서 잘 쉬고, 화장실도 해결하고, 세요 도장도 잊지 않고 찍었다. 후반부에는 길이 더더욱 예뻐져서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였다. 특히 유채꽃밭과 핑크색 나무가 연달아 있는 숲길을 걸을 땐 마치 요정들이 사는 나라의 손님이 된 것 같았다. 내 앞에는 양갈래 머리를 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벼운 가방을 메고 손을 잡은 채 산책하듯 걷고 계셨는데, 그냥 그 뒷모습을 보면서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두 분의 행복이 내게도 전이되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여행이 있을까. 이쯤 되니 발가락 물집 정도는 별것 아니게 느껴졌다. 물론 아픈 건 아픈데…. 일주일쯤 되면 적응이 될 거라고 하더니, 아픈 게 나아지는 건 아니고, 아픈 게 익숙해지는 건가 보다. 게다가 순례길에서는 모두가 아프다. 누구나 자기만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 별로 의미는 없지만 굳이 비교를 한다면, 무릎이나 발목 통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에 비하면 발가락에 생기는 손톱만 한 물집은 아주 사소한 고통이다.
물집은 그냥 두기로 했다. 터지려면 터지라지 뭐. 아직은 참을만한 고통이니 그냥 걷고, 못 걷겠으면 그때 쉬고.
그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걷다가 결국 공립 알베르게 입성에 실패했다. 으…. 아쉬워라. 공립 알베르게는 8유로인데 거기서 연결해 준 근처 사립 알베르게는 가격이 무려 두 배나 되었다. 그래봤자 15유로지만, 순례자 마인드에서는 좀 마음 아픈 지출이었다. 내가 나무등치에 기대어 앉아 계란 까먹고 노는 동안 서둘러 걸음을 재촉한 라나가 무사히 공립에 들어간 걸 보면 이건 늑장을 부린 대가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충분히 행복했으니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리라. (하지만 이 날 이후로 숙소에 대한 조바심이 약간 생긴 듯하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Casa Alberdi ★☆☆☆☆
1박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