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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Sep 10. 2024

Day9 순례길이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 걸까

비아나에서 로그로뇨까지 12km

Today’s route ★☆☆☆☆

비아나Viana → 로그로뇨Logroño 12km




오늘 걷기로 한 거리는 로그로뇨까지 12km밖에 되지 않는다. 남들이 한 번에 갈 거리를 두 번에 나누어 걷기로 한 덕분이다. 12km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로 느껴진다는 게 문득 낯설다. 평소 한국에서라면 절대 걸어서 갈 거리는 아니다. 이제 10km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까지 먹고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묵은 방의 어르신들이 새벽 5시부터 나갈 준비를 하며 부스럭거리는 바람에 일찌감치 잠이 깨고 말았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면 잘 만큼 잤기 때문에 눈이 뜨인 것이지만. 전날 비아나 숙소에서는 아는 사람도 없고, 바깥을 돌아다니자니 날은 너무 춥고, 할 일도 없고 해서 저녁 8시쯤 일찍 침낭 속으로 쏙 들어갔다. 이번 숙소의 인터넷은 좀 빠른 편이라 넷플릭스로 드라마 <눈물의 여왕>을 볼 계획이었다. 유럽의 2층 침대, 아늑한 침낭 속에서 즐기는 K-드라마라니. 설레기까지 했는데, 도저히 잠이 와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절반도 못 보고 9시도 되기 전에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8시간 넘게 숙면을 취했으니 양심이 있으면 이만 침낭 밖으로 나오는 게 맞지 싶어, 나도 덩달아 나갈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숙소 밖으로 나오니 아직 아침 7시도 안 되어 어둑했다.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하고 싶었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동네에는 문 연 바도 보이지 않았다. 걷다 보면 나오겠지, 생각하며 빈속으로 출발. 하지만 결국 로그로뇨에 닿을 때까지 어떤 바도, 화장실도 없었다. 거리가 짧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로그로뇨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고, 중간중간 쉼터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거리도 짧다 보니 가볍게 산책하듯 걸을 수 있어 좋았는데, 9시 반쯤 되었을까. 벌써 목적지에 도착해 버렸다.




매일 20킬로 넘게 걷다가 짧게 끊어 걸으니 걸은 것 같지도 않을 정도로 뭔가 허전했다. 오늘 목표한 거리를 걸었는데 다리도 안 아프고, 피곤하지도 않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유일하게 힘든 부분은 추위뿐이었다. 두 시간 남짓 걸으며 낸 열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로 덜덜 떨어야 했다. 4월 말의 스페인이 더울까 봐 걱정했지 이렇게 추울 거라고는…. 일단은 마을 초입에 순례자센터가 문을 열었기에 무거운 배낭을 맡겨두고 가벼워진 몸으로 시내로 향했다.

문 연 바에 들어가 또르띠야와 카페콘레체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오늘 하루 어떡할까 생각하기로 했다. 별로 걸은 것 같지도 않아서 로그로뇨를 지나쳐 한 마을 더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몸이 고되게 걷지 않으니 할 일을 다 안 한 것 같은 찜찜함과 허전함을 느끼는 나 자신이 문득 낯설고 신기했다. 어느덧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이 완전히 체화된 것일까.

하지만 팜플로나에서도 그랬듯 대도시에 오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좀 있었다. 사용 기한이 다 된 유심 충전도 해야 하고, 약국에 가서 물집밴드(콤피드)도 더 쟁여두어야 했다. 무엇보다 로그로뇨에서 유명한 타파스바 골목도 가봐야 했다. 여행 초반 함께했던 라나와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어서 같이 밥이라도 먹기로 약속했기에 하루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참, 바에서 이런저런 고민들을 하며 식사를 하는데, 나처럼 혼자 커피를 마시는 아시아 여성이 있었다. 알고 보니 한국 분이라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 때는 몰랐지만 이후로 몇 번이고 우연히 마주치게 될 ‘제비’님이었다.


아무튼 오전에는 로그로뇨 시내를 돌아다니며 볼 일을 처리하고, 순례자 센터에서 짐을 찾은 후 라나를 만나 로그로뇨 공립 알베르게에 가방 줄을 세웠다. 오픈 시간 전에 도착하면 굳이 그 앞에 서 있을 필요 없이 가방으로 줄을 세울 수 있다. 순례길에서 정착된 일종의 문화라 가방이 없어질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이라도 짐 무게를 덜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일상인 순례자들이 남의 짐을 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웃긴 건 가방 줄의 주인들이 대부분 한국인 순례자들이었다는 것. 이렇게 부지런할 수가 없다.


라나와 함께 그 유명한 타파스 골목부터 가보기로 했다. 먼저 그 유명한 엔젤스바의 양송이 타파스를 먹으러 갔다. 신선한 양송이버섯을 버터에 구워 빵 위에 일렬로 꽂으면 끝. 단순한 음식인데 너무 맛있었다. 시원한 끌라라 맥주를 곁들였더니 더욱 꿀맛.



라나는 로그로뇨에서 며칠 더 머물 예정이라 했다. 이유는 함께 걸을 친구들이 이쪽으로 합류하기로 했다는 것. 이미 5개월째 세계여행 중인 라나에게는 이전에 이집트 다합에서 2개월 머물며 친해진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이 함께 걷기로 하고 각각 영국과 스웨덴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중이라 했다. 아픈 다리를 끌고 혼자 걸으며 힘들어하던 모습을 봐왔기에 친구를 기다리며 라나의 표정이 보기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완주를 기원하며 건배를 했다.


로그로뇨 공립 알베르게 숙소도 꽤 괜찮았다. 역시 사립보다는 공립이 시설도 괜찮고 체계가 잡혀 있는 느낌이다. 지난번 로스 아르코스에선 영어를 엄청 잘하는 할머니 두 분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여기는 영어를 거의 못하는 할아버지 두 분이 관리하고 계셨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자리는 2층이었다. 그렇게 일찍 가방 줄을 세웠건만, 이곳은 선착순이 아니라 지정석이었다. 알베르게마다 기준이 다르므로 룰을 따를 수밖에. 가끔은 1층으로 해달라고 말이라도 해볼까 싶을 때도 있지만 꾹 참는다. 나보다 1층이 더 간절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괜한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는 라나와 함께 빨래를 모아 세탁기를 돌리고(4유로) 근처 마트에 가서 장을 봐왔다. 맥주랑 환타 레몬맛을 섞어 수제(?) 끌라라를 제조하기도 했다. 마트에서 사 온 거 이것저것 먹으며 또 수다를 나눴다. 주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얘기. 내가 앞서 가게 되겠지만 어차피 하나의 길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여정이라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를 일.



참, 오전에 만났던 제비 님은 바로 옆 침대였다. 큰 도시의 공립 알베르게는 일종의 만남의 광장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길 위에서 띄엄띄엄 보던 익숙한 얼굴들을 다시 만나게 되곤 한다. 팜플로나에서 만났던 15일 출발 멤버(제비님 포함)들을 모두 만났는데 이분들 아주 결속감이 대단했다. 거의 10명에 가까운 인원이 숙소 부엌에 모여 삼겹살을 구워 먹는데, 우리더러도 합류하길 권했지만 웃으며 사양했다. 한국인으로서 사양하기 어려운 냄새이긴 했다.


아쉬운 맘을 달래려 저녁때 라나와 함께 타파스바 순례를 돌았다. 8천 원짜리 비싼 와인도 마시고, 돼지고기로 만든 타파스 하나, 달콤한 끌라라와 함께 하몽으로 만든 타파스 또 하나. 그렇게 여기저기 돌며 먹고 마시다 보니 배도 부르고 얼큰하게 취기도 돌았다.


그러고 보니 이날은 점심때부터 밤늦게까지 계속 술을 마셨다. 이렇게 다니다 보니 근심걱정이 없었다. 내일은 어디까지 걷고, 숙소는 어디로 하고 그 정도 고민도 고민이라 할 수 있으려나. 발이 아픈 것 정도? 그게 무슨 걱정이나 된다고. 내일의 여정이 기대된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de Logroño ★★★☆☆

1박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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