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헤라에서 산토도밍고까지 21KM
Today’s route ★☆☆☆☆
나헤라Nájera →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de la Calzada 21km
순례길을 걸으며 많은 외국인들과 대화할 기회가 생긴다. 재미있는 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기 무섭게 자신이 아는 한국에 대한 것들을 줄줄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 다큐를 봤는데 무척 아름다운 곳이더라. 한국 화장품 너무 좋다. K드라마, 쇼트트랙, 삼성 등등의 얘기를 나눈다. “안녕하세요”하고 먼저 한국식 인사를 건네는 이들도 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눌 때마다 한국에 대한 위상이 참 달라졌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처음 여행 다닐 때만 해도(약 20년 전?) 유럽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어떤 때는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조금 관심이 있다고 하면 90퍼센트 ‘놀스냐 사우스냐, 북한 가봤냐, 김정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정치적인 질문이 되돌아오곤 했다. 외모만 보고 ‘곤니치와’ ‘니하오’ 인사를 받는 건 일상이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건 ‘북한과 김정은인가’하는 생각에 씁쓸한 적도 있었다.
북한에 대한 질문이 좀 줄어들기 시작한 게 강남스타일이 대히트한 시점인 2012년 즈음일 것이다. 당시 터키에 여행을 갔는데, 나는 내가 연예인이라도 된 줄 알았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일제히 환호를 하며 함께 사진을 찍자거나 강남스타일 춤을 추어대니. 그 이후로는 뭐 다들 알다시피 케이팝, 드라마 열풍으로 어딜 가도(동남아, 남미 등) 한국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한 걸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을 할 때 외에는 한국을 떠나 살아본 적 없는 나이기에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해 특별한 생각을 품을 기회가 없었다. 딱히 자긍심도 없고, 그렇다고 이민을 가고 싶을 정도로 싫지도 않은 그저 그런 느낌. 한국 또는 한국인에 대해 심도 깊게 생각해 보게 되는 건 역시 외국에 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의 입으로 스스로 말을 하게 되니까. I am Korean. I’m from South Korea. 나는 한국인입니다. 이곳에서 나를 정의하는 첫 번째 정체성은 ‘순례자’, 그다음이 국적이라는 걸 매일 느끼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길 위에서 짧게 인사를 나누다가, 바나 알베르게에서 우연히 만나 스몰토크를 하다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이름보다 먼저 묻게 되는 게 국적이다. 어찌나 다양한지 신기할 정도다. 이날 아침만 해도 파나마, 아일랜드, 웨일스 등등 다양한 국적의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순례길에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특별히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왜 이렇게 한국인들이 여기 많이 오는 거야?”
산티아고 협회 사무실에서 조사한 방문국 순위를 보면 최근 몇 년간 한국이 꾸준히 4~5위를 차지한다. 1~3위가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 비행기를 탈 필요도 없는 가까운 나라들임을 생각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먼 나라 사람들이 꾸역꾸역 걷겠다고 찾아오는 게 의아해 보일 법도 하다. 게다가 유난히 한국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이유가 있다. 한국만이 유일하게 단체팀을 꾸려 순례길을 걷기 때문이다. 40일에 가까운 코스를 어떻게 여행상품으로 만들어 팔 생각을 했는지 신기하기도 한데, 실제로 20~30명의 인원이 하나의 팀으로 순례길을 걷는다.
산토도밍고 가는 길, 평소보다 희한하게 한국 사람들이 많다 느꼈는데 바로 한국 단체팀과 루트가 겹쳐졌던 모양이었다. 전날 묵었던 나헤라의 거의 모든 숙소가 풀북이었던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영어에 서툰 나로선 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익숙하고 편해서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단체 특성상 다수가 몰려 있고, 자기들끼리 크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약간 민폐라 느껴지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아무튼 단체여행객들과 같은 루트를 걷는 건 개인 여행객들에게 여러 모로 손해인 건 사실이었다. (이 시점부터 한국 단체팀의 루트를 비껴가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된다.)
나헤라에서 산토도밍고 가는 구간은 여러 모로 기대가 되었다. 와인으로 유명한 리로하 지방답게 좌우사방 포도밭으로 가득한 평원을 걷게 되는데 그 풍경이 장관이었다. 걸을수록 기분이 점점 고조되었다. 아조프라, 시루에나 마을을 지나 산토도밍고에 가까워지자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 듯한 유채꽃밭과 하늘거리며 펼쳐진 밀밭 사이로 쪽 뻗은 곧은 길이 나타났다.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부드러운 능선을 자랑하는 나지막한 언덕들 사이로 직선으로 지평선까지 이어진 아름다운 길. 너무 예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내딛는 게 아까웠다.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건강하게 두 발로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가슴은 감사함으로 충만해졌다.
숙소에 도착하니 2시 정도 되었다 산토도밍고 공립 알베르게는 시설이 참으로 좋았다. 10일 넘게 경험한 알베르게 가운데 역대급으로 좋았다. 숙박비도 12유로 정도로 저렴했다.
최근에 리모델링을 했는지 시설이 모두 새것이었고 샤워실도 깔끔했다. 50센트만 넣으면 작동시킬 수 있는 헤어드라이어와 안마의자까지…. 특히나 가든이 예술이었다. 햇볕 잘 드는 양지바른 가든에 세탁시설과 족욕시설까지 마련되어 있고 무려 세제와 빨랫비누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모처럼 볕이 좋아 손빨래를 많이 했다.
그리고 나서야 막 도착한 유정언니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틀 전 삶은 달걀이랑 사과랑 이것저것 먹다 보니 대충 배가 불렀다. 그때쯤 시간이 4시가량 되었던 것 같다. 어지간히 배도 부르고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어 저녁은 그냥 패스할까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이때부터 자기 전까지 내가 얻어먹은 것을 대략 헤아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틀 연속 옆 침대 당첨된 아시안 아메리칸 아저씨한테 와인 한잔, 생장 때부터 계속 같이 마주치고 있는 한국인 부부 분들께 잘 구운 소고기 등심 두 점(냄새 좋다고 옆에서 킁킁거렸더니 바로 집어주심, 한 개는 정 없다고 두 점 집어주심), 팜플로나, 로그로뇨 등등에서부터 계속 마주치고 있는 선규, 영순님 저녁 먹는데 끼어서 삼겹살이랑 구운 양송이, 와인 또 한잔. 두 분 쉬러 올라간 후 혼자 남아서 일기 쓰는데, 지나가던 흰 수염 서양할아버지가 빈 와인 잔 또 채워주심. 그냥 빈 와인잔을 가지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여기저기서 와인을 채워주는 격이었다. 그렇게 얻어마신 와인만 서너 잔. 얼큰히 취해 있는데, 선규님이 타파스에 와인 한잔하러 빨리 나오라고 해서 저녁에 나가 또 얻어먹었다.
음, 어쩔 수가 없네. 나의 먹을 복은 스페인에서도 유효한 걸로.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Cofradía del Santo ★★★★★
1박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