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로뇨부터 나헤라까지 29km
Today’s route ★★☆☆☆
로그로뇨Logroño → 나헤라Nájera 29km
순례길에는 짐 배달 서비스(Baggage Transfer Service)라는 게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구한 역사를 지닌 듯하다. 차가 없던 옛날에도 노새로 짐을 옮기곤 했다고 하니. 그래서인지 한국인들 사이에는 일명 ‘동키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알베르게 리셉션 옆에는 항상 짐 배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봉투가 비치되어 있어 순례자들을 유혹한다. 뒤로 갈수록 배달 업체도 다양해지고 가격도 저렴해지지만 대개 6유로(한화 8500원) 정도면 이용할 수 있다. 이용 방법도 간단하다. 비치된 봉투에 다음 날 내가 가고자 하는 마을 이름과 숙소 이름을 적은 뒤 돈을 넣어 가방에 묶어두면 된다. 몸도 마음도 가벼웁게 순례길을 걷고 숙소에 도착하면 내 가방이 먼저 도착해 내게 인사를 건넨다.
참 편리한 서비스지만 순례자들 사이에서는 논란의 여지도 많다. 순례자란 자기 짐을 지고 걷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짐의 무게는 생의 무게이자 욕심의 무게이므로 모두 자기가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순례의 본래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거나 다름없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를 꼰대들의 편협한 주장으로 치부하고 순례길을 즐기는 사람들의 다양한 니즈와 방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반반이다.
기본적으로는 짐을 지고 걷는 게 맞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이용할 수도 있지 않나 싶은 거다. 좋은 말로는 융통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별 의견이랄 게 없다. 그러고 보니 나는 세상 대부분의 일에 대해 그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구나, 란 생각도 든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않나. 하면서 늘 애매한 포지션을 취해왔다. 그렇게 자기 의견 없이 애매하게 나이를 먹으면 이룬 게 하나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된다.
참 이 얘기를 왜 꺼냈냐면, 그렇다. 바로 이 날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맘먹었기 때문이다. 로그로뇨부터 나헤라까지는 29km로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10일 만에 도전하는 최장 거리이기도 하다. 사실 동키 서비스는 첫날 생장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이미 한 번 이용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땐 이제 막 여정을 시작해 아픈 데 하나 없는 새 몸(?)이었고, 지금은 피로와 자잘한 부상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불쌍한 몸이니 사정도 크게 달라졌다. 이유는 또 있다. 어째서인지 숙소 경쟁이 점점 치열해져서 느긋하게 즐기면서 걷는 게 어려워졌다. 순례자들끼리 주고받는 대화 중 대부분이 숙소에 대한 얘기일 정도다. 내일 어디까지 가니, 거기는 요즘 숙소들이 다 풀북이래, 숙소는 예약했니, 거긴 리뷰가 별로던데, 난 일단 선착순 공립 시도해 보려고, 등등. 그런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다 보면 절로 위기감에 사로잡혀 그론즈앱을 뒤적이며 예약 전화를 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나헤라의 숙소는 전날 4군데나 전화를 돌려 “Sorry, We are full.”이란 대답을 듣고 난 후에 겨우 찾은 곳이었다. 여기가 몇 자리나마 남아있었던 것은 주인장이 오직 스페인어로만 예약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나의 알량한 스페인어 대화 스킬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아무튼 그렇게 순례길 여정 중 최장 거리인 29km를 아주 가벼운 몸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걱정한 것과 다르게 오르막 내리막이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라 난도는 높지 않았다. 다만 이날도 너무 춥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걷는 내내 얼굴을 강타하는 맞바람을 맞으며 걷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봄의 산티아고가 이렇게 추울지 몰랐다. 새벽엔 거의 영하에 가깝게 기온이 떨어지곤 했다. 대낮에도 해만 없으면 몸서리쳐질 정도로 추웠다. 이 날은 하늘도 너무 흐리고, 가끔 비도 뿌려서 기분도 꿀꿀했다. 만약 유정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꽤나 고단한 길이었을 터였다. 로스아르코스 지점부터 간간이 만나며 인사를 나누던 분이었는데 이 날 일정이 비슷해서 내내 같이 걸었다. 나랑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봤는데 과연 그랬다. 친절하고 성격 좋으신 분이라 함께 으쌰으쌰 하며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며 걷다 보니 힘들지 않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나헤라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유정언니는 따로 예약한 숙소가 있어서 나헤라에서 바이바이.)
내가 예약한 나헤리노 호스텔은 공립이라 되어 있긴 했는데 사립으로 운영되는 곳 같았다. 에너지 넘쳐 보이는 여주인장이 내가 들어가자마자 “비노(Vino)?”하고 물었다. 와인이란 뜻이다. 웰컴 드링크로 그냥 주는 건가 싶어 “씨(Si).”하고 대답했더니 예쁜 와인잔에 한 잔 가득 따라 주었다.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10유로에 저녁 식사도 이용할 수 있었는데,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먹을 계획이어서 신청하지 않았다. (빵이 지겨운 한국 순례자들 사이에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입소문 난 식당이었다)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듯했다(그리고 둘 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남자가 장을 잔뜩 봐온 것을 슬쩍 봤는데 작은 사과가 수십 개는 담겨있는 봉투에 ‘4유로’라고 되어 있었다. 유럽 과일 물가는 어쩜 이리 저렴한지! “만쟈나?”하고 물었더니 “만사나”라고 정정해 주며 사과 하나를 내게 선물해 주었다. 한국은 물가가 올라서 사과 하나에 3유로나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속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여기서 과일이나 실컷 먹고 가자.
스페인어로만 예약을 받아서인지, 나헤리노 호스텔에는 한국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전날 로그로뇨 숙소에서는 내 옆에도 내 옆의 아래도, 그 옆에도 한국 사람들로 가득해 온통 한국말만 들렸는데, 하루 사이에 갑자기 외국에 온 느낌이었다. 좋은 점은 2층이 없는 1층 침대로만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언젠가부터 1층 침대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숙소에 도착한 뒤 침대가 1층이냐 2층이냐에 따라 뭔가 그날의 승패가 갈리는 기분이 든다).
간만에 혼자 중국집 가서 메뉴를 2가지나 시켜 배 터지게 먹고 대충 씻고, 옷도 빨아 널고, 안티푸라민으로 다리 마사지 하며 웰컴드링크로 받은 레드와인을 홀짝이는데 뭔가 좀 행복했다. 비록 동키 서비스의 도움을 좀 받았지만 30km에 육박하는 먼 거리를 씩씩하게 다 걷고, 스페인어로 숙소 예약도 잘하고, ‘나 혼자서도 썩 잘해나가고 있잖아?’ 으쓱하게 되는 느낌. 전문용어로 ‘자아효능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쑥쑥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침대에서 발마사지 하고 스트레칭한답시고 어수선하게 움직이다가 바로 옆 협탁에 올려놓은 와인잔을 툭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붉은 와인이 바닥에 촤악. 주변의 외국인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웁스" "워우"
아, 정말이지 나란 녀석……. 잘해나가고 있기는 무슨!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다. (사고 수습은 남자주인장이 해주었다. 깨진 컵도 줍고, 마대 가져와서 와인도 다 닦고. 나는 옆에서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뭘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하다가 구글 번역기를 열심히 돌려 ‘죄송합니다. 깨진 컵을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등등 사죄의 말을 전하려 노력했다. 인심 좋은 주인장은 괜찮다고 그냥 편히 쉬라고 했다. 스페인어 ‘뜨랑낄로(tranquilo)’가 정말로 내게 위안을 주었다.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이 다 날 뻔.)
그렇게 나는 조금 고개를 들려고 했던 자신감과 자만심을 고이 접어 묻어두고 다시 겸손한 마음을 장착하고 침낭 속에 들어가 얼른 잠을 청했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El Peregrino Najerino ★★★☆☆
1박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