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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Sep 13. 2024

Day12 천천히 걸어도 괜찮아

산토도밍고에서 벨로라도까지 21KM

Today’s route ★☆☆☆☆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de la Calzada → 벨로라도Belorado 23km 





오늘은 출발부터 유정언니와 함께 길을 나섰다. 나보다 두 살 많은, 호감 가는 인상의 언니다. 길이 하나니,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순례자라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마주치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모두와 친해지는 건 아니다. 계속 만나지만 어색한 사람이 있고, 뭔가 끌어당김이 느껴져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사람이 있다. 유정언니는 후자다. 늘 웃는 표정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 주변의 공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달까. 

그래서 걷는 동안 이 얘기 저 얘기 많이 나누며 즐겁게 걸어올 수 있었다. 날씨는 전날보다 좀 흐렸지만 오늘 역시 예쁜 길이 이어졌다. 그라뇽까지 기분 좋게 걷다가 야외 테라스가 멋진 좀 특별한 바를 만났다. 미니버스를 개조한 형태의 바였는데 순례자용 아침 메뉴가 다양하게 제공되고 있었다. 금방 갈은 오렌지주스에 설탕 넣은 카페콘레체, 초콜릿패스츄리까지. 아주 달콤한 아침식사였다. 특히 빵이 어찌나 맛나던지. 마침 햇살도 기분 좋게 따스해져 멋진 풍광 감상하며 행복하게 식사를 했다. 참 이곳에서 유정언니의 친구인 카트린도 만났다.  




독일 베를린 금융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카트린은 한 달 휴가 기간 동안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 자신은 고행을 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알베르게에는 묵지 않고, 호텔 싱글룸만 이용하며, 아주 쉬엄쉬엄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밝고 명랑한 친구였다. 카트린, 유정언니와 함께 셋이서 동행을 이뤄 걷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두 명이다 보니 아무래도 우리끼리 얘기를 좀 하게 되었는데, 듣고 있던 카트린이 자신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우리는 ‘안녕. 내 이름은 카트린’ 이렇게 가르쳐줬다. 최대한 짧아야 쉽게 익힐 것 같아서. 하지만 한 번도 한국말을 접해보지 못한 카트린은 마치 ‘에일리언의 말’처럼 들린다고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는 내내 반복하고 연습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 날은 카트린 덕분에 정말 천천히 걸었다. 유달리 자주 마을이 등장했는데, 마을이 나올 때마다 바에 들르거나 벤치에 앉아 쉬었더니 거의 2km마다 멈추는 셈이 되었다. 순례길을 시작한 이래 이렇게 천천히 걸은 건 처음이어서 신선하기까지 했다. 모든 순례자들이 우리를 추월해 앞서 갔으니까. 순례자들끼리의 불문율로 앞선 사람을 추월할 때 꼭 먼저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를 건넨다. ‘부엔 까미노’는 때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 마법의 단어다. 안녕하세요, 나는 순례자입니다, 미안하지만 앞서 갈게요, 힘내세요 등등. 

농담 삼아 우리는 ‘팀 슬로우워커’라며 빨리 걷는 사람은 퇴출하기로 했다. 그래서 빨리 걷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조금 앞서 나갈라치면 “어? 너 지금 너무 빠른데? 조심해 주길 바라.” 서로 주의시키며 깔깔 웃어댔다. 그렇게 셋이 걸음 속도를 맞춰가며 걷는 건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다. 겉모습이야 당연한 거고, 여행을 대하는 대도 내지는 패턴이라고 해야 하나. 생장에서 출발해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은근한 속도 경쟁도 있고. 대부분은 은퇴나 퇴사 후에 한 달 이상 시간을 모처럼 만들어서 멀리 여행을 온 이들이다 보니 한정된 시간 내에 목표했던 바를 이뤄야 한다는 의식이 공통적인 듯하다. 

하지만 이날은 카트린도 그렇고, 벤치에서 쉬던 중에 우연히 만난 독일인 버카드 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유형을 많이 보게 된 날이었다. 버카드 씨는 나이가 예순 정도 되었을까,  조금 슬픈 눈빛의 아저씨였는데 세상에 독일 베를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부터 여정을 시작해 스페인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총 3300킬로미터를 4년에 걸쳐 나눠서 걷기에 도전 중이라고 했다. 4년 전에 뭔가 힘든 일을 겪으셨고 그 이후 도전을 시작하신 듯. 이번 여정이 최종이라고 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참 멋진 인생의 도전인 듯하다. 그런 도전이 가능한 큰 대륙에서 사는 유럽인들이 좀 부럽기도 했고.




오늘 걸은 거리는 21킬로밖에 안되었는데 3시 다돼서 숙소에 도착했다. 중간중간 하도 많이 쉬었더니 다 걷고 났는데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보통은 근육통 때문에 계단을 오르내릴 때 으으 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오거나 절뚝거리곤 했는데, 뛰어서 오르내리는 게 가능하다니? 몸을 제대로 혹사시킨 것 같지 않아(?) 좀 섭섭할 지경이랄까. 


참 오늘은 걸으면서 유정언니, 카트린과 함께 ‘메뉴 델 디아’를 꼭 먹자고 얘기를 나눴었다. ‘메뉴 델 디아’란 각 식당에서 준비하는 ‘오늘의 메뉴’로 메뉴 2개와 음료, 디저트까지 코스로 제공되기 때문에 순례자에게는 가성비 좋은 든든한 한 끼가 되곤 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스페인의 식당들은 우리나라처럼 계속 문을 열어놓고 손님을 기다리지 않는다. 점심 장사는 3~4시면 끝이 나고 저녁 시간은 7시 반~8시 정도에나 다시 시작된다고 했다. 6시에 먹고 9시에 잠자리에 들면 딱 좋은데, 아쉬웠다. 결국 아무 문 연 바에 들어가 피자랑 타파스를 사 먹었다. 돌아오는 길엔 슈퍼에도 들러 이것저것 샀다. 




우리가 들어간 숙소는 다른 숙소에 비해 사람이 적어서 12명도 넘게 들어가는 다인실에 유정언니와 나 포함해 3명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편하고 조용하게 단잠에 들 수 있었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Belorado El Corro ★★★☆☆

1박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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