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로라도에서 산후안까지 24km
Today’s route ★☆☆☆☆
벨로라도Belorado → 산 후안 데 오르떼가 San Juan de Ortega 24km
간밤의 산토도밍고 숙소는 그 넓은 방에 여자 셋만 자니 조용해서 좋았지만 새벽엔 난방을 안 틀어줘서 몹시 추웠다. 자다 말고 주섬주섬 패딩을 찾아 입고 다시 침낭 속으로 쏙 들어갔다. 잠은 깼지만 추워서 침낭을 벗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손만 내밀어 머리맡의 휴대폰을 확인하니, 밤 사이 카톡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다. 남편으로부터 온 메시지는 요사이 연락이 뜸한 것에 대한 투정이었고(걷는 중엔 바빠서, 다 걸은 후에는 피곤해서 연락을 잘 못하곤 했다. 내 잘못이다) 일 관련 메시지도 여럿 와 있었다. 최근에 한국에서 출간된 여행 가이드북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리 반가운 내용은 아니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한숨이 나왔다. 몸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 걸까, 내가 늘 해왔던 일에 회의감이 많이 느껴졌다. 마흔 넘은 나이엔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별 볼 일 없는 모습으로 헤매고 있는 나.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이렇게 존중받지도 못하고 합당한 보상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슬퍼졌다.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거리다가 결국 잠이 다 깨서 채비를 시작했다. 순례자의 아침 루틴은 비슷하다. 물집이 생기지 않게 발가락 사이에 바셀린을 꼼꼼하게 바르고 땀 흡수가 잘 되는 울양말을 신고, 얼굴에는 선크림을 바르고, 걷다가 더우면 하나씩 벗을 수 있게 옷도 여러 겹 겹쳐 입는다. 마지막으로 무릎보호대까지 양 무릎에 착용하면 끝. 배낭을 메고, 오늘 하루 종일 걸어야 할 길이 내 앞에 끝없이 펼쳐진 것을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한국에서의 복잡하고 잘 안 풀리는 내 삶을 작은 공처럼 뭉쳐서 저 뒤로 던져버리고 씩씩하게 걸어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수록 무거운 마음은 가벼워졌다.
오늘은 4월 26일. 맨 처음 출국한 게 3월 26일이니 이 여정도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파리 여행을 며칠 하고, 남프랑스 친구네 집에 갔다가 할머니 부고 소식을 듣고 바로 표를 사서 네덜란드를 경유해 긴급 귀국. 상 치르고 열흘 정도 다시 준비해 순례길로 돌아왔다. 본격적으로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건 2주 정도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과정이 다 순례길의 일부라고 여겨졌다. 이 멀고도 고단한 길을 자청해서 걷고 있지만, 머릿속에 멈추지 않는 질문이 있다. 왜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유정언니는 오늘 카트린과 함께 비야프랑카까지만 간다고 했다. 부르고스까지 약 50km가 남아있는데 이 거리를 두 번이 아닌 세 번에 나누어 가겠다는 계획이다. 비야프랑카는 12킬로밖에 안되는데, 두 시간 반이면 갈 거리다. 나도 뭐 딱히 서둘러 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순례자에게 12킬로는 걸었다기에도… 쉬었다기에도 애매한 거리다. 게다가 체력도 남아돌고… 순례길에서 남아도는 체력을 어디다 쓸 것인가. 그래서 나는 24킬로 거리인 산 후안까지 가기로 했다. 딱 하나 불안요소는 산후안 숙소 예약에 실패했다는 것. 잘만한 곳은 선착순입장인 공립 알베르게뿐이었다.
첫 마을 카페에서 유정언니와 카트린을 만나 반갑게 인사 나누고, 다음에 보자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팀 슬로우워커와는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아쉽게 헤어졌지만 나중에 또 만나게 된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았다. 다행히 길이 너무 예뻤다. 자주 걸음을 멈추곤 했다. 아, 자주 걸음을 멈춘 이유는 또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말 수집’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길 곳곳에 설치된 표지판의 안내 문구, 앞선 순례자들이 벽이나 돌 위에 남긴 낙서들이 마치 길이 내게 전하는 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가끔은 그게 길과 내가 나누는 대화 같기도 했다.
이를테면 위에서처럼 ‘왜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는가’를 고민하며 대체 이 길이 끝날 때까지 과연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할 때 우연히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Most of the time, when you don't get answer, It's because you didn't find the good question.
대부분의 경우, 당신이 답변을 얻지 못하는 것은 좋은 질문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표지석에 누군가 매직으로 정성 들여 써놓은 문구는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본 듯했다. 적어도 이 길을 걸으면서 ‘내가 왜 걷고 있지?’라고 묻는 것은 좋은 질문이 아니란 것을 알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답을 찾을 때가 아니구나. ‘좋은 질문’을 찾아야 할 때구나.
때때로 순례길을 걷는 것은 오감으로 길과 소통하며 걷는 것과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특히 이런 식으로 길이 직설적으로 말을 걸어올 때는 더 강렬한 인사이트를 얻게 된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까미노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고 할까. 나는 그렇게 이 여정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오늘 여정의 중간 지점인 비야프랑카에서 또르띠아로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시간을 보니 11시 30분이었다. 숙소 예약을 해두었다면 좀 느긋했겠지만, 이날은 사정이 그렇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끼고 남은 12km를 전력으로 걸었다. 오르막 내리막도 심하고 중간에 비도 오고 나름 위기가 있었지만 약 2시간 반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산후안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는 2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산후안 공립알베는 옛 교회건물로, 좋은 말로 하면 엔틱하고 운치 있었고 나쁜 말로 하면 시설이 아주 열악했다. 특히 매트리스 상태와 협소한 구조가 아주…. 내가 묵어본 역대 공립 중 최악이라 할만했다. 시설로 봤을 때는 10유로도 아까운데 15유로나 받아먹다니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순례자에게는 하룻밤 잘 수 있는 침대 하나만 있어도 감사한 일이다. 다행히 순례자 메뉴를 8유로에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어 미리 신청해 야무지게 먹고 누웠다.
아.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추운 걸까. 침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de San Juan de Ortega ★☆☆☆☆
1박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