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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Sep 17. 2024

Day14/15 혼자지만 결국 혼자가 아니야

산후안에서 부르고스까지 26km

Today’s route ★★★★☆

산 후안 데 오르떼가 San Juan de Ortega →  부르고스 26km 




내게도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잘 자기’가 아닐까 싶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 열악한 환경에서 8시간이나 깨지 않고 잘 잤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으니까. 오래된 철제 2층 침대는 윗사람이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며 마치 기차를 탄 것처럼 흔들렸다. 매트리스는 가운데가 푹 꺼져 잘하면 그 사이로 빨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춥기는 또 어찌나 춥던지. 얼마나 오래 안 빨았는지 알 수 없는 두꺼운 담요나마 침대 수만큼 비치되어 있었기에 망정이지, 영하에 가까운 아침 기온에 노출된 얼굴의 두 뺨은 차갑게 얼어 있었다. 


오늘은 부르고스 가는 날. 전날 부킹닷컴에서 40유로짜리 싱글룸 숙소를 하나 예약했다. 나만의 공간에서 하룻밤이나마 편히 먹고 놀고 즐길 생각에 벌써부터 설렜다.

하지만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스산한 추위에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고 있었던 것. 하지만 비가 온다는 이유로 걷지 않는 순례자는 없다. 평소보다 더 야무지게 준비운동을 하고, 있는 옷 없는 옷 다 꺼내 입었다. 나시, 반팔티, 남방, 패딩, 방수방풍 재킷까지. 총 5겹을 껴입었으니… 단단히 대비를 했더니 과연 춥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부터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다가 더 많이 오다가 잠깐 그쳤다가 바람과 함께 오다가 했다. 이날의 BGM은 백예린의 ‘Antifreeze’. 이 노래의 가사를 따라 부르며 차가운 비바람에 맞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시간쯤 걸어 아헤스 도착. 푹 젖은 재킷을 벗어 물기를 털어내 의자에 걸어놓고, 따뜻한 카페콘레체와 엠빠나다를 주문해 아침으로 먹었다. 이렇게 험한 날씨일수록 바의 존재는 더욱 소중해진다. 5.5유로가 아깝지 않다. 비도 그을 수 있고, 잠시나마 옷을 말릴 수도 있고, 화장실도 해결하고, 배고픔도 해결하고 다리도 쉬고…. 참, 전날 열악한 숙소에서 휴대폰 충전도 할 수 없어 배터리가 30%밖에 안 되었는데 중간중간 바에서 몰래 충전도 했다. (순례길의 바는 이 모든 것을 용인해 주는 분위기다. 양말을 벗고 발을 의자 위에 올려놓든, 주문은 안 하고 화장실만 이용하든 뭐라 하는 곳이 없다.)






다음 마을은 아타푸에르카Atapuerca. 여기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동네라고 하던데. 하지만 여유 있게 둘러볼 여유(?) 따윈 없다. 비바람은 더 거세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갈길에 오르막길까지….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중얼거리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무자비한 땅바닥이 안 그래도 매일 수만 보씩 걷느라 예민해진 내 발바닥을 학대하는 듯했다. 걸을 때마다 너무 아팠다는 뜻이다. 산꼭대기에 올랐더니 거대한 십자가가 두 팔 벌려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 십자가에는 누가 걸었는지 신발 한 켤레가 걸려있었다.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렇게 가끔씩 만나는 종교적 조형물들이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자꾸 일깨워준다. 



아타푸에르카의 십자가



끝없는 먹구름 속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날씨가 좋았다면 귀엽고 보기 좋았을 작은 마을을 지나쳐 부르고스를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이날 내가 마음이 좀 급했던 이유가 있다. 하루 먼저 부르고스에 도착해 있는 생장 동기 현석씨와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르고스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 지금까지 걸었던 순례길 중 최악의 코스일 줄이야. 부르고스 공항을 비껴가는 코스로 바뀌어서 그런지, 순례길 표식도 거의 없다시피 했고, 차가 씽씽 달리는 고가나 고속도로를 걸어야 하는 구간도 꽤 많았다. 고속도로 옆 샛길이 나있길래 그쪽으로 빠져나와 걷다 보니 낭떠러지로 이어질 뻔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위험했다는 얘기다. 


생각해 보면 이게 보통이다. 도시의 많은 길들은 ‘걷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걷는 인간만을 위한 길은 자연적으로 난 샛길이나 오솔길 정도이지, 자본을 투입해 만드는 대부분의 길은 자동차 등 이동수단을 위한 길인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도시에서 인간이 마음 편하게 걸을 수 있는 도로는 복지용으로 세금을 들여서 만드는 경우가 전부다. 만약 세금이 부족하다면 치앙마이처럼 걷기 불편한 도시가 되는 거고.

아무튼 지금까지 걸었던 엄청난 길이의 걷기 좋았던 길. 평평하고, 충분히 넓고, 안전하고, 아름다운… 그런 길이 참으로 특별했다는 것을 되새기며 나는 부르고스 시내로 들어섰다. 





시내에서도 한참을 걸어 겨우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1시 반 정도. 문제는 숙소에서 약속장소인 한식당까지 거리가 4킬로인데 걸을 힘도, 시간도 내겐 없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하나의 선택지. 그나마 있는 돈을 써야지. 그렇다. 처음으로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고작 4킬로. 1시간이면 걸을 수 있는 거리를 10분 만에 가며 8.7유로를 썼다. 돈보다도, 고작 4킬로를 걷지 않고 차를 탔다는 게 좀 자존심이 상했다. 순례자가 택시를 타다니, 이렇게 불경할 수가. 하지만 한식을 향한 나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내가 김치찌개를 먹으려고 그 비바람을 헤쳐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순례자들 사이에선 부르고스의 ‘소풍’이라는 한식집이 꽤 유명하다. 그리고 한식집은 여럿이 가야 여러 가지 메뉴를 시켜 먹을 수 있다. 사실 그게 현석씨와 오랜만에 의기투합한 이유이기도 했다. 현석씨는 생장 숙소에서 만나 여행 초반을 함께했다. 피레네의 그 살인적인 오르막길을 함께 걸었고, 수비리에서 같이 맥주도 마셨던 사이. 고작 그 정도가 전부지만 한국인 순례자에게는 ‘생장 동기’가 주는 의미가 특별하다. 




열흘 만에 다시 만난 건데 굉장히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서양식만 먹다 보면 가장 그리운 게 맵고 뜨끈한 국물요리였다. 우리 둘이서 김치찌개, 떡볶이, 제육볶음 주문. 아주 시뻘건 음식들로 한상이 가득 찼다. 오랜만에 먹으니 왜 이렇게 맛있든지. 참, 식당에서 제비님을 또 만났다. 혼자 오셨음에도 와인 한잔과 함께 아주 야무지게 식사를 하고 계셨다. 순례길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이제 익숙하지만 그래도 신기하다. 


밥값을 현석씨가 많이 내서 후식이라도 내가 사주고 싶었다. 그래서 유명한 츄러스 카페에 가서 초코에 찍어먹는 츄러스를 처음으로 사먹어봤다. 성당도 대충 구경하고 이후의 우연한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제 숙소에 돌아가야 하는데 걸어가기엔 이제 체력이 바닥나 있었고, 또 다시 택시를 타려니 순례자로서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내 눈에 보인 버스! 어떻게 버스를 타야 하나 고민하는데 잘생긴 스페인 청년이 자기 교통카드로 내 것까지 내 주겠다 했다. 버스비가 얼마냐, 돈으로 주겠다 했는데 상큼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배낭을 메고 있진 않았지만 추레한 행색으로 내가 순례자라는 걸 알아본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젊은 청년이 어찌나 싱그럽게 미소를 날리던지. 단번에 부르고스라는 도시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 


숙소 들어가기 전 마트에 들러 과일과 빵, 과자 등등을 잔뜩 샀다. 하지만 마트에서 숙소입구까지 가는데 그 사이에 우박이 어찌나 쏟아지던지 깜짝 놀랐다. 숙소에 들어가서 씻고 젖은 옷들을 모아 빨래하고 혼자 놀다 잘 잤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12시에 체크아웃할 때까지 최대한 침대를 즐겼다. 인터넷도 하고, ‘눈물의 여왕’ 드라마도 보고 혼자만의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짐 싸들고 숙소 밖으로 나와 천천히 시내를 향해 걸었다. 아를란손 강을 따라 조성된 너무나도 아름다운 산책로와 공원을 걸었는데, 그 시간이 참 행복했다. 분위기 좋은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는 주말 아침이라니!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한 시간은 2시쯤이었다. 1박에 10유로. 와, 시설이 너무 환상적이었다. 이렇게 세련된 알베르게가 있다니. 2층 침대만 피할 수 있었다면 더 없이 좋았겠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많이 걷든 조금 걷든 다리가 항상 아팠다. 종아리 통증은 이제 익숙해져서 그렇다 쳐도 발 통증은 이제 만성이 되었다. 앉거나 누워 있다가 첫 발을 디딜 때 찌릿하고 통증이 올라오는데 2층 침대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가 가장 심했다. 그런 이유로 침대가 2층으로 배정되면 휴식보다는 고통의 느낌이 더 크게 다가오곤 했다. 


2시 넘어 라나가 부르고스에 도착했다며 같이 밥을 먹자고 연락을 해왔다. 나보다 이틀이나 늦게 로그로뇨를 떠난 걸로 알고 있는데 벌써 나를 따라잡다니. 젊은 친구들이랑 같이 걷다보니 시너지가 나는 것 같았다. 마요르 광장에 있는 노천 식당에서 만나 처음으로 메뉴델디아를 먹었다. 전식 하나, 본식 하나, 디저트와 알콜음료 포함. 양이 너무 많긴 했지만 그래도 참 맛있었다. 라나와 함께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4시엔 혼자서 성당 관광을 했다. 순례자용 요금 5유로 내고. 성당이 아니라 마치 미술관 같았다. 




저녁때도 약속이 있었다. 유정언니, 카트린과 함께 성당 미사를 보고 같이 저녁 먹기로 한 것이다. 미사를 보러 갔더니 또 마태오님 등 반가운 얼굴들을 잔뜩 보았다. 미사는 대성당의 작은 예배당에서 열렸는데 대부분이 순례자들이었다. 마지막엔 신부님이 성수를 뿌리며 축복 기도를 내려주었다. 축복을 받겠다고 모인 순례자가 수십 명은 될 것 같았다.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모두 제각각인 사람들이 하나의 길을 걷겠다고 이렇게 모여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서로를 전혀 모르는데도 동질감을 느낀다는 게 기적같이 느껴졌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점심 때 메뉴델디아를 하도 배불리 먹어서 소화가 되지 않았다. 문 연 식당도 얼마 없어서 우리 셋은 숙소 근처의 일식당을 들어가 간단히 교자만두와 끌라라를 주문했다. 카트린, 유정언니와는 이 자리가 마지막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아쉬웠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지게 될까. 


어째선지 이번 브루고스에서 머무는 이틀 동안 무려 식사 약속이 3개나 되어서 은근히 바빴다. 순례길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하다니 참 즐겁다. 

나 홀로 순례길에 올랐지만, 결국 나 홀로 걷는 길은 아닌 셈이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Casa del Cubo de Burgos ★★★★★

1박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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