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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Sep 19. 2024

Day17 영적인 길에 한 발짝 들어서다

오르니요스에서 카스트로헤리즈까지 20km

Today’s route ★★

오르니요스 Hornillos → 카스트로헤리즈Castrojeriz 20km 




여정 초반에는 매일 걸을 때마다 새로 생기는 발가락 물집 때문에 전전긍긍했는데, 중반에 이르니 새로운 고통이 날 괴롭게 하고 있다. 이틀째 밤에도 가려움증이 가라앉지 않아 몇 번을 잠에서 깼다. 거울을 볼 때마다 붉은 발진으로 물든 흉한 내 얼굴을 마주 봐야 하는 것도 고역이다. 한국인 부부가 한층 더 심해진 내 얼굴과 목을 살펴보더니 ‘약 먹으려면 아침을 챙겨먹어야 한다’며 에너지바 하나를 쥐어주셨다. 이것이 까미노 프로바이드.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오늘도 부엔 까미노 하세요!” 한국식 까미노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순례자들끼리는 족하다. 제법 쌀쌀한 아침이라 따뜻한 홍차와 함께 에너지바로 아침을 대신하며 다운된 기분을 끌어올려보고자 애썼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숙소를 나서 걷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환상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날은 아침 7시가 되기 전, 평소보다 좀 이른 시간에 나왔는데 그 때가 막 동이 트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온 세상이 몽환적인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산맥과 그 앞으로 드넓게 펼쳐진 평원 사이로 오묘한 형태의 안개가 너울거리며 아침햇살에 물들었다. 잠을 제대로 못자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마치 꿈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자꾸만 멈춰서곤 했다. 많은 순례자들이 나를 지나쳐 “부엔 까미노” 인사를 건네곤 한 방향을 따라 줄지어 걸어갔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엔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었는데 그 풍경이 뭐랄까. 이 세상의 것 같지가 않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언덕길을 오르는 순례자들의 뒤로 신성한 햇살이 후광처럼 비추고 있었다. 모든 인간들은 달을 바라보며, 해를 등지고 한 방향으로 걷는다. 아니 인간뿐만이 아니라 해도 달도 모두 서쪽을 향한다……. 대체 무엇을 향해? 서쪽 끝엔 무엇이 있기에?

나도 모르게 작게 뇌까렸다. Go West. 펫숍보이즈의 유명한 노래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을 의역하면 ‘죽다’, ‘몰락하다’라는 뜻이다. 답은 금세 나왔다. 아,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구나. 



문득, 며칠 전 부르고스에서 만난 제비 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산토도밍고 가는 길, 그 아름다운 평원길을 걷는데 막 벅차오르는 거예요. 이 비현실적인 풍경을 혼자 보긴 아깝잖아요. 한국에 있는 가족들 생각이 나서 휴대폰을 열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마침 단톡방에서 가족들이 자기들끼리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거든? 뭐 어디다 뒀냐. 이거 샀는데 받아놔라 뭐 그런 아무 것도 아닌 대화였는데, 그 안엔 내 자리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 가족단톡방에 분명 내가 있는데 없는 것 같고. 마치 저승에서 이승에 사는 가족들을 내려다보는 느낌? 그 때 깨달았어요. 나는 지금 죽은 상태구나! 순례길은 죽으러 가는 길이구나! 순례길을 다 걷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그 때서야 나는 새로 태어나는 거구나.”

그 때는 그냥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하며 재미나게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 것만 같았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크게든 작게든 많은 순례자들이 영적인 경험을 한다. 순례길 여정이 중반에 들어서고 있는 지금, 나는 이 신비로운 길에 깊숙이 발을 디딘 느낌이었다. 종교적 사회적 고정관념을 최대한 벗고 나는 온몸을 열어 순례길이 내게 전하려는 말을 다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순례길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자꾸 걸음을 멈추고 샛길로 새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지난밤 내 옆자리에서 주무셨던 선희님이 커다란 DSLR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순례길에 저렇게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온다는 건 사진에 대한 여간한 열정이 아니고선 힘든 일이었다. 이날은 선희님과 함께 걸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시청 공무원으로 오래 재직하다가 퇴직 후 등산, 마라톤, 여행 등 삶을 제대로 즐기는 분이었다. 




온타나스에서 들른 예쁜 바에선 커피와 또르띠아를 사주시기까지 했다.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글 잘 쓰라는 의미로 사주시는 거라며…. 오늘만 해도 두 번째 까미노 프로바이드다. 감사히 받는다. 온타나스 성당에도 들어가 기부금 내고 초도 밝히고 세요도 찍었다. 

그 다음 마을은 컨벤토 데 산 안톤. 참 멋져 보이는 유적지였는데, 아쉽게도 입장불가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밖에서 외부만 구경할 수 있었다. 그 근처에 주민이 직접 만들었을 듯한 라벤더 방향제와 허브티가 테이블 위에 진열되어 있었다. 순례길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일종의 도네이션 바다. 차나 과자를 준비해둔 테이블도 있고, 식수나 작은 액세서리를 마련해둔 곳도 있다. 자유롭게 돈을 두고 가져오면 된다. 이 때 얻은 라벤더 포푸리는 이후 여행 내내 악취로부터 내 코를 보호해주는 소중한 동반자가 되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카스트로 헤리즈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였다. 어제 미리 예약했지만 안 해도 되었을 뻔했다. 이번엔 운이 안 좋게도 또 2층 당첨. 아. 사흘 연속 2층이라니. 너무 힘들다, 정말. 

씻고 빨래하고 좀 쉬고 있노라니 그새 동네 한 바퀴 돌고 장보고 빨래까지 마친 선희 님이 동네 구경하러 가자고 보챘다. 60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다. 하긴 마라톤을 4시간 반 만에 완주하는 체력이니 뭐. 

그렇게 선희님과 둘이 동네를 슬렁슬렁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돌아다녔다.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역사적인 배경이 느껴지는 유서 깊은 고장이라는 느낌이었다. 산꼭대기에는 오래된 성채가 남아있고 바로 아래는 중세 분위기의 오래된 동네, 더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듯한 신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마을에 약국이 있길래, 피부에 바를 연고를 드디어 구입할 수 있었다. 5시에 슈퍼마켓이 문을 연다고 하여(이 나라는 슈퍼마켓조차도 시에스타를 엄수한다) 기다릴 겸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옆 자리의 동네 주민이 예쁜 꽃 한 송이를 선물이라며 주었다. 와우, 세 번째 까미노 프로바이드. 

저녁 장을 봐서 선희님과 함께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토마토소스, 마늘, 햄 등등 넣어서 쿠커에 넣고 끓이니 그럴듯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되었다. 거기에 와인도 곁들이고.




참 저녁 때 다른 숙소에 머물고 계신 마태오님한테 연락이 왔다. 본인 숙소 지하에 무슨 유적지가 있다며 8시에 투어가 있으니 구경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가볍게 슬리퍼 끌고 가는데 거의 600미터 되는 거리라 꽤나 고생했다. 옛날 와인공장을 리모델링한 건물인지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는데 마치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지하실처럼 좁은 계단 통로를 통해 한참 내려가니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와인 저장소가 나왔다. 어두컴컴한 지하 와인저장소에서 막 따른 와인을 한잔씩 마셨다. 각 나라 말로 건배도 외치고. 



뭐 이렇게 꽉 찬 하루가 다 있지. 오늘 아침에 내가 뭐 땜에 다운됐었더라? 오늘 아침이 굉장한 과거로 느껴지는 묘한 하루. 두드러기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연고를 바르니 미칠 듯한 가려움증은 좀 잦아들었다. 그래, 곧 낫겠지. 이 정도 고난은 나의 순례길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municipal de peregrinos San Esteban ★★★☆☆

1박 9€(탈수기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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