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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Sep 20. 2024

Day 18 메세타 평원의 기적 같은 하루

카스트로헤리즈에서 비야르멘테로까지 37km

Today’s route ★★★★★

카스트로헤리즈Castrojeriz →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Villarmentero de Campos 37km 




오늘은 정말 대단한 날이었다. 내가 까미노에서 꿈꾸던 모든 것이 이루어진 날이라고 할까. 

원래는 프로미스타까지 29km가량을 걸어야 하는 날이었다. 프로미스타는 하루 끊어가기에 딱 적당한 위치와 거리에 있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카스티야 운하 등 볼거리가 많아 유럽인들이 일부러 관광을 하러 오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단체 여행객들이 하필 그날 그 마을을 접수하는 바람에 웬만한 숙소는 모두 예약이 차 있었고,  선착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는 낙후된 시설과 추위로 악명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덜 가려고 하면 너무 조금 걷게 되어 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그보다 좀 더 가보려고 하면 적당한 숙소가 있는 마을까지는 총 35킬로를 걸어야 하는데 한 번도 도전해보지 못한 거리라 자신이 없었다. 



일단 가보자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그날 묵었던 카스트로헤리즈의 공립 알베르게는 기부제로 아침식사까지 먹을 수 있도록 해주어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출발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 날의 길은 순례자를 위해 이것저것 선물을 준비해 놓은 신의 배려로 가득했다. 

7시가 되기 전에 길을 나섰더니 막 떠오르기 시작한 오늘의 태양과 함께 출발할 수 있었다. 오늘도 본격적인 메세타 평원 길이 시작되었다. 메세타 고원이라고도 부르는 이 지역은 해발고도 600~900m의 다소 높은 곳에 위치한 대평원이다. 메세타(Meseta)는 우리말로 ‘책상’이란 뜻이라 하니 대충 어떤 모양인지 가늠이 되리라. 우리나라 면적을 넘어서는 규모라 단순히 광활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높은 고도 위에 그늘 없는 초원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순례자들 사이엔 악명이 높은 구간이기도 하다. 


*메세타 평원이란
부르고스를 출발하는 순례자는 메세타에 관한 악명 높은 소문을 듣게 됩니다. 부르고스와 빨렌시아, 레온의 끝나지 않게 이어지는 메세타는 여름에는 순례자에게 사막과 같은 열기와 건조함을, 겨울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시베리아 동토의 차가움을 선사합니다. 많은 순례자들은 이러한 메세타를 건너뛰기 위해서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기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메세타는 순례자에게 진정한 순례의 기쁨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한국산티아고순례자협회


순례자협회 홈페이지에서 이런 글을 읽고 나서 나에겐 오히려 도전의식이 생겼다. 메세타 평원을 꼭 두 발로 꼭꼭 밟아서 건너리라 다짐했다. 뭔가... 내가 꿈꾸던 순례길의 풍경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이날 아침 내 선택에 대한 응답을 들은 것 같았다. 



마을에서 나와 좀 걷다 보면 모스떼랄리스 언덕이라는 꽤나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바람도 차고 거세서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고, 숨은 점점 가빠졌다. 하지만 조금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은 것이 높은 곳으로 오르면 오를수록 펼쳐지는 아름다운 대평원의 풍광 때문이었다. 잠시 거친 숨을 다독이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노란빛의 여명 아래로 아름다운 세상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짙은 운해가 막 떠오른 태양을 떠받치듯 대지 위에 깔려 있었는데 그 풍경 또한 장관이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아침빛에 모양과 분위기를 달리 하는 하늘과 땅과 나무와 꽃들을 보느라 감탄하기 버거웠다. 정신없이 사진 찍다 걷다를 반복하는데 어느 순간 울컥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아 얼른 눈가를 훔쳤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산 니콜라스성당을 만났다. 작지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예배당이자,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바 겸 알베르게였다. 늙은 신부님 혼자서 순례자들을 위해 매일같이 이렇게 무료 바를 준비하고 계셨다. 버터와 잼, 빵, 쿠키도 있었다. 모카포트로 금방 내린 커피는 정말 따뜻하고 맛있었다. 지갑에 있는 동전을 꺼내 기부를 하고 세요도 찍고 나왔다. 어떤 상업적인 의도도 느껴지지 않는 검박한 공간과 분위기에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은 어두컴컴하고 낡은 예배당 공간이 그토록 성스럽게 느껴질 줄이야.


산티아고 성당을 나와서 다시 걷기를 시작하는데 자꾸 머릿속에 ‘주기도문‘이 맴돌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마지막으로 성당에 간 게 십수 년 전의 일이니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떠올려본 적도 없는 기도문이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 기도문을 외우니 벅찬 마음이 조금 해소가 되고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밤 9유로에 제공된 따뜻한 잠자리, 따뜻한 차와 빵 한 조각이지만 충분하고도 감사했던 아침식사, 메세타 평원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일출, 산 니콜라스 성당의 아름다운 환대. 우연의 연속일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은혜를 받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사하는 마음이 울컥 차올랐는데, 그 대상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을 찾게 되었다. 누군가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야 감사의 마음도 구체화되는 것 같았다. 아, 그래서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구나. 힘들 때, 기댈 곳이 필요할 때 신앙이 필요한 줄 알았는데, 그 반대일 때도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하는구나. 감사함이 목 끝까지 차오르면 내뱉어야 되는구나. 아, 이 길 참 희한하네. 없던 신앙심도 생기게 하는 길이네.


빨렌시아 지방의 시작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길을 걷다가 먼저 출발했던 선희님을 다시 만났다. 한참 그렇게 같이 걷는데 카스티야 운하 초입에서 우연히 캐나다 교포 부부를 만났다(순례길에서 우연한 만남은 참으로 흔하다). 남자분이 캐나다에서 약사를 하시는데 며칠 전에 두드러기로 고생하는 내게 항히스타민 연고를 빌려주기도 하셨던 고마운 분이다. 모든 일정을 다 예약하고 움직인다고 해서 많은 순례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만큼 철두철미한 준비를 해오신 분인데, 그분이 좋은 팁을 알려주셨다. 30분 정도 기다리면 프로미스타까지 가는 배가 올 거다. 가격은 3유로인데, 순례자 여권을 보여주면 2유로로 깎아줌. 세요도 찍어줌. 



프로미스타까지는 5km가량 남은 시점. 하지만 이 아름다운 운하에서 배를 타보는 경험은 누구도 하지 못할 경험이 아닌가. 하필이면 타이밍도 이렇게 잘 맞는데. 이건 타고 가라는 신의 계시다. 선희님과 나는 그 뜻에 순종하기로 했다. 5km를 배로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배 기다리는 시간, 배가 도착해서 대기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걸어가는 시간이 훨씬 빨랐을 테지만. 고요한 운하를 바라보며 한 시간 남짓 누렸던 휴식은 꽤나 달콤했다. 게다가 걸어서 갈 길을 배를 타고 이동했으니 5km를 절약한 셈이 되었다. 



이 덕분에 아침의 내 고민은 자동으로 해결되었다. 선희님과 함께 프로미스타를 지나쳐 그다음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까지 더 걷기로 한 것이다. 그론즈맵과 알베르게 정보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비야멘테로캄포스에 있는 알베르게를 새로운 목표로 정했다. 전화 문의하니 다행히 2자리는 예약할 수 있다고 했다. 선희님과 나는 프로미스타에서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3시 반부터 5시 반까지 약 2시간을 열심히 걸었다. 


중간에 충분히 쉬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무거운 배낭을 지고 30킬로를 걸은 셈이었으니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처음으로 발목에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그래서인지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고 있는 작은 알베르게가 더욱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세요를 찍으며 ‘어디서부터 왔어? 37km! 너희 대단하다’하며 환영해 주는 주인장의 환대는 더욱 따스했다. 게다가 여정 중에 만났던 이들이 거기 다 모여 있는 것도 신기했다. 전날 같은 숙소에서 묵었던 한국인 자매, 초반부터 계속해서 공립 알베에서 마주쳤던 지혜와 정은. 그들과 함께 온 한국인 청년 태우. 독일인 버카드 등등. 저녁식사도 신청해서 7시에 같이 먹었는데, 지금까지 먹었던 숙소 디너 중 가장 맛있었던 최고의 만찬이었다. 샐러드, 스튜, 파스타, 라이스, 빵 등등 메뉴가 거의 7~8가지였고 뷔페식이었는데 놀라운 건 그 모든 것이 다 채식이었다! 태어나서 먹은 채식 요리 중 이날 먹은 음식들이 단연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날씨가 좀만 따뜻했다면 밖에서 가만히 일몰만 바라봐도 좋을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추운 관계로 모두 저녁식사 후에 난롯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주인장이 기타를 들고 나타나더니 라이브 연주를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울뜨레야 수세이야’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되었다. 까미노를 찬양하는 노래라는데 노래 자체도 너무 좋고, 목소리도 그렇고 분위기가 금세 낭만적으로 바뀌었다. 앵콜송으로 찬송가도 부르고.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노래의 힘이란. 정말 행복했다. 이상하게 약간 눈물이 날 것도 같고. 모든 순례자들 모두 뭐라 설명하지 못할 감성과 감동에 젖어 그녀의 노래를 들었고, 분위기에 취해 음악을 좀 할 줄 아는 다른 순례자들도 기타 연주와 노래를 선보였다. 특히 뮤지컬을 전공했다는 한국 청년 태우의 노래는 더욱 감동적이었다. 갑자기 내적 친밀감이 형성되어 한국 청년들과 오래 대화를 나눴다. 직장을 관두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순례길 여행을 선택한 사람, 대학을 졸업하고 갈 길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자신을 찾는 여행이 필요한 사람…. 뭔가 삶의 초행길에 선 젊은 사람만이 지닌 고민들을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묘했다. 





누구도 나에게는 질문을 하지 않았기에 내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왜 순례길을 걸으러 왔니. 무엇을 원하니. 

답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순례길에서 본 글귀가 생각났다. 나에게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 필요하다. 그래, 나는 답이 아닌 질문을 찾는 여행을 해야지. 

원래대로라면 그냥 지나쳤을 마을과 알베르게. 기억에도 안남을 작은 마을이었지만 푸른 초원과 풀을 뜯는 조랑말, 거위, 양떼 등 너무 아름다운 곳을 놓칠 뻔했다. 이 감동적인 저녁이 없을 뻔했다. 이날 갑자기 우러난 신앙심 때문인가. 누군가가 나를 이곳으로 이끈 듯한 묘한 느낌에 두근대는 가슴을 지그시 다독일 뿐이었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Amanecer ★★★☆☆

1박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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