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아미 Sep 23. 2024

Day 19 육체는 점점 지쳐가지만

비야르멘테로에서 깔자디야까지 26km

Today’s route ★★★★☆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Villarmentero de Campos → 깔자디야 데 라 쿠엔자Calzadilla de la Cueza 26km 




이 감동적인 숙소는 아침식사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놓았다. 시설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난방 안 됨, 온수 잘 안 나옴, 매트리스 낡음 등등) 그런 게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만큼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애정을 가지고 순례자들을 대접하고 공간을 운영하는 주인장의 마음씨 덕분일 것이다. 




주스와 우유, 커피 등의 음료는 물론이고 시리얼, 빵, 간단한 계란프라이까지 해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차려준 성의가 고마워서 알차게 아침을 챙겨 먹고 남은 동전을 다 털어 기부박스에 넣고 왔다. 그렇게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출발하려는데 독일인 버카드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전날 한국인 청년 태우가 부른 노래 영상을 좀 보내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어지간히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이미 왓츠앱 친구등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와이파이가 잘 되는 곳에 가면 기꺼이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 날은 깔자디아까지 26킬로를 걸어야 하는 날이었다. 기분 좋게 출발하긴 했지만 사실 컨디션이 좋지만은 않았다. 전날 무리했던 탓인지 발목 통증이 여전했다. 얼른 한국에서 챙겨 온 소염진통제를 꺼내 먹었다. 참, 두드러기 약도 먹어야지. 항히스타민제도 먹고, 하나 남은 스테로이드도 먹고, 걸으면서 무슨 과자 먹듯이 약을 입에 계속 털어 넣었다. 아프면 어쩔 수 없이 약에 의존하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 건강하다고 늘 자신만만했기에 이런 나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사실 순례길 중반에 이르면서 몸 컨디션이 점점 망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좀 쉬엄쉬엄 가도 되지 않나 싶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약을 먹으면서라도 오늘 26km를 걷는 건 마을이 하나도 없는 마의 17km 구간을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끊어가기가 참으로 애매한 루트라고 할까. 다음 대도시인 레온까지는 계속 지루한 평원길이 이어지는데 이 때문에 버스로 점프하는 순례자들이 많은 구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른 데는 몰라도 메세타 평원만큼은 반드시 발로 꼭꼭 밟고 싶었다.

이날은 걷는 내내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어 계속 혼자 걸어야 했다. 혼자 걷노라면 필요이상으로 자주 쉬게 되어 시간이 많이 지체되곤 했다. 누구와 말을 하며 걸으면 그래도 신경이 다른데 쏠려 더 많이 걸을 수 있는데 말이다. 어떤 일이든 약간의 강제요소가 있어야 목표를 쟁취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경우 최소한의 강제요소는 숙소를 미리 예약해 놓는 것. 나는 오전에 전화를 걸어 목표 마을인 깔자디아의 공립 알베르게에 침대 하나를 예약했다. 예약금을 걸어놓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기다리는 곳이 있다는 생각이 어떻게든 걸음을 옮겨놓게 한다. 





끝도 없이 펼쳐진 메세타 평원. 가도 가도 길이 계속 이어진다. 내 눈이 닿지 않는 곳 저 너머까지 이어져 있겠지. 한국엔 산도 많고, 건물도 많아서 이렇게 넓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은 제주도 정도밖에 없다. 이곳에 와서 하늘과 평원은 실컷 보고 가는 것 같다. 이렇게 넓게 펼쳐진 평원을 걷다 보면 지구 위에 내가 서있다는 실감이 난다. 땅은 그대로고 하늘은 쉴 새 없이 바뀐다. 구름은 바람의 결에 따라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해는 동에서 서로 이동한다. 저 멀리 먹구름이 보인다. 곧 비가 내리겠지. 재킷 후드를 뒤집어쓴다. 이내 후득, 후드득. 금방 지나갈 비라고 생각했지만 꽤 많은 비를 맞았다. 





깔자디아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푹 젖은 상태. 숙소 컨디션은 그리 나쁘지 않았고, 도미토리 내에서는 난방도 잘되었지만 정작 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특히 계단 오르내릴 때 다리 통증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비도 오고 날씨도 그래서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이닝룸에서 일기를 썼는데,(숙소 인터넷이 잘 안 돼서 침대에서 인터넷을 할 수도 없었다) 같은 테이블에 전날 같은 숙소를 썼던 한국인 자매를 또 만났다. 웬 노부부와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인사를 했는데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감동적인 숙소의 추억과 더불어 나름 좋은 대화를 공유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안녕하세요’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는데 무시. 못 들었나 싶어 한 단계 더 소리 높여 다시 ‘안녕하세요!’ 하니까 그제야  ‘아... 네네’하고 마지못해 받아주었다. 오히려 노부부 분들이 참 인상도 좋고 선하셨다. 혼자 떨어져 있는 내게 빵도 나누어주고,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고 하시고. 

신기하게도 내게는 그토록 차가운 사람들이었는데 그 노부부 분들 앞에서는 세상 살갑고 싹싹한 젊은이들이었다. 새삼 인간관계가 그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겐 참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에겐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일 수 있는 거다. 100프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없다.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도 없다. 그들에겐 내가 그리 호감이 생기는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쳇, 나도 마찬가지다.





혼자 끝도 없이 이어진 평탄한 길을 몇 시간씩 걷다 보면 이렇게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게 된다. 인간관계, 삶, 이래저래 만난 사람들, 지금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들. 모두 휘발되어 버린 생각들이지만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며 걷게 된다. 하지만 모든 하루를 마치고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는 순간, 모든 상념은 사라지고 그대로 곯아떨어진다. 그렇게 순례길의 하루가 또 갔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MUNICIPAL ★★★☆☆

1박 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