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아르코스에서 비아나까지 18km
Today’s route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 비아나Viana 18km
전날, 늑장을 부리며 걷는 바람에 공립에 못 들어가고, 근처의 비싼 사립 알베르게에 묵었다. 장점은 덜 붐비고, 2층 없는 1층 침대에서 편히 잘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방에 묵은 순례자들은 나처럼 걸음이 느린 분들이 공립에서 퇴짜 맞고 오셨는지, 대부분 연세가 많은 서양 노인들이었다. 애매한 육십 대 노인이 아니고, 언뜻 봐도 나이가 일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 진짜 어르신들이라 절로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짐을 풀면서 자연스럽게 한 보따리나 되는 약봉지를 촤라락 펼치실 때는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5월이 코앞인데도 이른 아침엔 거의 0도에 육박할 정도로 추웠다. 잔뜩 굳은 몸을 녹이고 출발하고 싶어서 출발 전 라면 수프를 물에 타서 뜨끈하게 한 컵 마셨다. 스트레칭도 좀 하고, 씻고, 출발 준비를 마치니 어느새 시간이 7시 반. 숙소를 나서려는데 작은 소동이 있었다.
한 할머니 친구가 편지만 남기고 떠나갔는데, ‘피를 너무 흘려서 병원에 가야 했고 그래서 까미노를 함께하지 못할 것 같다.’ 이런 내용이었단다. 놀람과 위로의 말들을 주고받는 노인들을 보며 나까지 덩달아 걱정이 되었다.
가끔 궁금하다. 7080 어르신들은 목숨을 걸고 까미노를 걸으러 오는 걸까. 엊그제도 까미노에서 사망사고가 있었단 말이다. 부부였고, 할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길에서 쓰러져 결국 사망. 부인은 이렇게 말했단다.
“그는 자신이 있고 싶은 곳에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 갔다.”
나오는 길에 그 친구분을 먼저 보낸 할머니에게 안 되는 영어로 쏘리 포 유어프렌드 어쩌고 마음을 표현했다. 대충 위로의 뜻을 전하고 싶었는데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는 “어쩔 수 없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야” 이런 식으로 말하며 “부엔 까미노.”하고 떠나가셨다. 그래, 결국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내 앞에 놓인 길을 계속 걷는 것.
하지만 나는 이 쉬운 일도 제대로 못해서 숙소를 나오자마자 순례길을 거꾸로 걷다가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왜 자꾸 순례자들을 마주치지? 이상하다,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음. 혼자 다니다 보면 길을 잘못 들 때가 종종 있다.
혼자 낯선 곳을 여행하는 일은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많은 편이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경제적인 부담도 더 커지고, 때때로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까미노는 혼자 오기 참 좋은 곳인 것 같다.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은 물론, 경제적인 부담도 적고, 여행 자체가 걷기뿐이니 준비할 부분에 대한 난이도가 확실히 낮다. 가끔 길을 잘못 들 때만 빼면. 새로운 친구 사귀기도 수월해서 외로움도 훨씬 덜하고. 결론은 나에게 최고의 여행지란 뜻이다. 이 소중한 혼자만의 시간을 잘 즐겨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음 마을인 산솔까지 가는 길은 아침 해를 등으로 받으며 앞으로 곧게 난 밀밭 길을 끝없이 걷는 길이었다. 해가 떠오르니 기온은 15도 정도로 딱 좋았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왔고, 아침 해는 온화하고, 구름은 없고, 하늘은 파랗고, 꽃들은 알록달록. 그런데 나는 나의 그림자만 보며 걸었다. 저벅저벅. 내 걸음소리만 들었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산솔에서 들렀던 바는 작고 소박했지만 크라상이 참 맛있었다. 커피, 크라상, 바나나 한 개 해서 3유로. 4천5백 원 정도.... 참 괜찮은 가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도 해결하고. 확실히 순례길은 다른 곳보다 상업화가 느린 것 같다. 이 문화가 오래오래 보존되었으면.
빵을 너무 맛있어하며 먹고 있는데, 며칠 전 레이나 가는 바에서 만났던 애리조나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이 분도 진짜 연세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여서 기억에 남았다. 동행 없이 혼자서 걷는 듯했다. 나보고 아직 젊고 일할 나이 같은데 어떻게 왔냐고 물었더랬다. 미국인에게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은 은퇴 후에나 도전해 볼 수 있는 과제인 듯. 아무튼 며칠 만에 다시 보니 반가웠는데, 역시나 여기저기 편찮은 곳이 많으신 듯했다. 길을 나서자마자 약국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부디 무사히 완주하실 수 있길 기도했다.
오늘 루트는 로그로뇨까지 이어지는 29킬로 길인데, 나는 이 길을 끊어가기로 했다. 원래 로그로뇨가 대도시라 2박을 하며 하루 쉬어갈 생각이었으나 ‘10만 원 돈을 주고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중간에 한번 끊고 가면 쉬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비아나까지 18km만 걷기로 결정.
비아나까지는 바르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그늘 아래 쉴 곳이 마련되어 있어서 바나나도 먹고 초콜릿우유도 먹고 그랬다. 잠시 쉴 수 있는 의자와 정기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듯한 휴지통까지. 대체 이 길 관리는 어디서 하는 걸까. 스페인 정부에서? 성당에서? 종교단체 자원봉사자들이? 지역주민들이? 누구든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이 길은 전적으로 인간이 만든 길이다.
비아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쯤 되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자리는 넉넉했지만 자리 운은 좋지 않았다. 어중간한 문 앞 위치의 침대 2층 자리. 그나마 난간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20킬로 넘게 걷다가 18킬로만 걸으니 땀도 안 나고 그리 걸은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때가 되니 또 배가 고파서 근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메뉴 델 디아’를 먹으려고 했는데 호텔레스토랑이라 그런지 36유로나 했다. 그래서 클라라 맥주랑 타파스 3개를 시켜서 먹었다. 그런데 이건 계산할 때 보니 6유로밖에 안 나왔다. 맥주야 1유로 조금 넘는 수준인 걸 알고 있지만 타파스가 이렇게나 저렴하다고?
밥을 먹고 나와서는 한량처럼 동네를 돌아다녔다. 일요일 오후의 느긋하고 명랑한 동네 풍경을 구경하며,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일기를 쓰기도 하고. 모처럼 휴식 같은 하루를 보냈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Andrés Muñoz ★★★☆☆
1박 8€(일회용 침대커버 비용 별도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