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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Sep 25. 2024

Day21 우리는 순례길의 마법에 걸려들었다

사아군에서 베르시아노스까지 14km

Today’s route ★★☆☆☆

사아군Sahagun → 베르시아노스Bercianos del Real Camino 14km 




아침 9시. 평소라면 한창 걷고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나는 어제 처음 만난 27세 청년과 함께 사아군의 한 베이커리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어도 그칠 줄을 몰랐다. 빗속을 뚫고 이내 첫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마태오님이었다. 

우연한 만남은 아니고, 실은 내가 그를 불렀다. 전날, 독일인 버카드와의 우연한 조우로부터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던 나는 누군가에게 상담을 받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맨 처음 생각난 사람이 바로 마태오님이었다. 까미노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깊은 신앙심을 지닌 사람. 저 자신은 걸인 같은 외양에 검박하게 생활하지만 타인에게는 무엇이든 베풀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매일 모든 미사에 참석하고, 식사할 때마다 기도하고, 누군가 2층 침대에 속상해하면 선뜻 자기 침대랑 바꿔주겠다 하고, 젊은 친구들에게 밥 사주고, 술 사주고……. 한번은 한국인 순례자 단톡방에서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버스에서 배낭을 통째로 다 털린 사람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본인이 비용을 다 대주겠다며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게 마태오님이었다.(안타깝게도 그 분은 여정에 대한 회의감이 심했는지 바로 한국으로 귀국해버린 듯했다).

나는 마태오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어디쯤에 계신가요. 좀 신기한 경험을 해서 신앙적 지식을 갖고 계신 분이랑 말씀 좀 나누고 싶은데……. 

24시간 누군가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마태오님은 즉각 답을 해주셨다. 그리고 사아군에서 15킬로 가량 뒤에 있는 마을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해서 빗속을 뚫고 걸어오신 것이었다. 


푹 젖은 비옷과 모자를 벗으며 밝게 인사를 나눴다. 난 그에게 어제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다. 마태오님은 “예수를 만나셨네요.”라고 했다. 예수가 그 독일인의 형상으로 나타난 거라 했다. 좀 다른 관점이었다. 내가 조연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내 인생에서는 내가 주인공인 게 맞으니까. 그런 관점에서는 보면, 나는 예수를 만났고,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영광을 얻은 셈이었다. 사실 완전히 납득이 되는 설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관점의 좋은 대화였다. 

마태오님은 형우와도 인연이 있었고, 그저께 비야멘테로 헤리즈의 알베르게에서 우연히 만난 태우 청년과도 인연이 있었다. 그뿐인가. 며칠 나와 같이 걸은 선희님, 영순님, 선규님, 유정언니 등등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았다.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진실을 되새겼다. 까미노 위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서로 연결된다. 인간 세상의 축소판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고 완벽한 의미의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윽고, 두 번째 손님들이 도착했다. 나의 생장 동기 라나와 그의 친구 민지. 발 통증 때문에 부르고스에서 버스로 점프한 형우와 사아군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라나와는 오랜만에 만나는 느낌이었지만 그래 봤자 일주일 정도 되었나? 하지만 순례길에서는 꽤 긴 시간이다. 아무튼 다시 보니 또 반가웠다. 까미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단 한 순간의 인연으로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우연과 우연이 겹쳐 여정의 동반자로 자리잡는 인연도 있다. 라나와 나는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 


사아군은 프랑스길의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라 여기서 반주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처음에 나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생장에서 출발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기념증서라는 라나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해서 같이 받으러 갔다. 여러 명과 어우러져 같이 뭔가를 하고, 함께 걷고, 음식을 나눠먹고, 사진을 찍고 하다 보니 이제껏 느끼지 못한 여행의 묘미가 느껴졌다. 실은 사아군에서부터 여행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끌림에 따르기로 했다. 남은 일정을 라나, 민지, 형우와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하는 거라곤 걷고 또 걷기만 하는 여행인데, 지루할 새 없이 새로운 일들이 자꾸 생겨나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게 된다. 여행의 중반. 나는 이 여정에 아주 깊이 푹 빠져버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순례길의 마법에 걸려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마태오님은 우리가 전날 묵었던 숙소 이야기를 듣고는, 거기서 하룻밤 머물러보고 싶다며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늦은 출발이라 베르시아노스까지 14km만 걷기로 했다. 라나와 민지는 이미 새벽부터 15킬로를 걸어온 상태라 그 정도가 딱 적당할 듯 싶었다. 베르시아노스에는 꽤 입소문이 좋은 기부제 알베르게가 있었다. 우리보다 한 코스 정도 먼저 걷고 있는 현석님이(저녁식사가 맛있다고) 강력 추천한 숙소였기에 일단 그곳을 목표로 걸었다. 예약을 받지 않고 선착순으로 가야 하는 곳이라 빈 자리가 없을까 봐 좀 걱정했는데, 신의 은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순례길 중반부터 누군가 나를 챙겨준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너희들 4명이구나. 친구들이야?”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너희들은 행운아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딱 하나 밖에 없는 4인룸을 쓰게 해주겠다는 거였다. 기부제 숙소는 아무래도 기부로 운영되는 특성상 많은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바닥에 낡은 매트리스만 덜렁 깔려있거나 찬물만 나와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묵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부는 말 그대로 기부라 전적으로 자유의사에 맡긴다. 10유로 20유로씩 내는 사람도 있고, 아예 안 내는 사람도 있다. 이따금씩은 최소 얼마 이상은 기부하라는 당부를 듣는 경우도 있다. 

그런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우리끼리만 묵을 수 있는 4인실을 쓰게 되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감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7시 저녁식사 시간이 하이라이트였다. 식사 세팅을 하느라 자원봉사자들이 분주했다. 나도 같이 도왔다. 접시는 가운데에 포크는 오른쪽에 나이프는 왼쪽에, 티스푼은 포크와 접시 사이에, 접시 위에 빨간색 냅킨까지. 이어 바게트 빵이 가득 담긴 바구니와 와인 잔 스물여덟 개가 세팅되었다. 부엌에선 28인분의 요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메뉴는 매일 달라지는 듯했다. 전식은 신선한 샐러드(구색만 맞춘 샐러드가 아니었다. 금방 따온 느낌이 드는 아주 신선한 샐러드였다), 메인은 파스타, 후식은 요거트였다. 와인은 무한대로 리필되었다. 4인 룸에, 이렇게 훌륭한 식사까지 대접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포르투갈, 영국, 브라질에서 왔다는 나이 지긋한 세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전날 이 알베르게에 묵고 간 순례자들이 기부한 돈으로 준비한 저녁이니 마음껏 즐기라’고 당부했다. 어떤 이는 기타를 가져와 연주를 시작했고, 서로에게 행운과 건강을 빌어주었다. 



음식을 축복하세요.
내 친구들을 축복하세요.
내 형제들을 축복하세요.
손을 잡은 모든 이를 축복하세요!



이건 벽에 붙어있는 기도문? 노랫말 같은 것이었는데 식사 때마다 함께 제창한다고 했다.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고, 나중에 해석했는데 딱 그 식사 때의 분위기를 함축하는 노랫말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8시에는 바로 옆에 있는 예배당 공간에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각자의 언어로 까미노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다. 작은 창으로 오후의 저녁놀빛이 성스럽게 스며들어와 어두컴컴한 예배당 바닥에 볕뉘를 만들었다. 소감은 제각각이었다. 내 옆의 어린 서양여성은 너무 힘들다고 울먹거리기도 했고, 할 말이 없다며 패스하는 이도 있었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기도를 올리는 이도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순례길의 마법에 걸려들어 반쯤은 홀려있는 상태였기에 ‘해피’니 ‘미라클’이니 하는 말을 써가며 행복감을 잔뜩 표현했던 것 같다. 





마지막엔 서로서로 포옹을 나누었다. 누군지도 모르고, 또 언제 만날지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사람들과 이렇게 따뜻한 인류애를 나누는 경험은 참으로 특별했다. 밖에선 칼바람이 부는데, 기부와 자원봉사로만 운영되는 이 오래된 알베르게 안은 하나의 작은 천국이었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Parroquial Casa Rectoral ★★★★☆

1박 기부제(저녁식사, 아침식사 포함)








'마흔에 홀로 떠나는 산티아고' 시리즈는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1부 연재를 마칩니다. 연재를 따라와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어떻게 읽으셨는지 소감이 참 궁금합니다. 혹시 기다려주신다면, 남은 구간 걸은 이야기도 모아서 10월에 2부로 돌아올게요! 행복과 충만함이 가득한 가을 되시길 빕니다:)

-홍아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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