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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Jan 03. 2018

여행은 현실도피? 그게 뭐 어때서

여행자로 살아가고 있는 한 여자의 자기합리화

여행이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 내 현실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들. 단지 다른 것은 실제로 보고 얘기하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여행의 시간이 끝나면 바뀐 것 하나 없는 그대로의 현실. 여행자로 계속 살 수는 없는 걸까.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그러니까 열두 살, 열세 살? 그 시절의 난 책만 읽었다.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학교에서는 조용히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는 책을 보고, 집에 오는 길에도 뒷얘기가 궁금하면 책을 보면서 올 정도였다. 친구랑 수다를 떨고, 교실 뒤편에서 공기놀이나 줄넘기를 했던 기억 따윈 없다. 집에 오면 숙제를 하고, 또 책을 읽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우리집에서 가장 작은 기차방(좁고 길쭉한 관 같이 생긴 방이었다)에 누워 해가 지고 어두워져서 더 이상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책을 읽곤 했던 기억이다. 불을 켜면 되었을 텐데, 왜인지 나는 캄캄해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집을 부렸다. 이윽고, 완전히 어두워져서 책을 읽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마음마저 어두워졌다. ‘모험과 꿈이 가득한 환상의 세계’에서 뛰어 놀다가 “시간 됐으니 넌 네 세계로 가!”하고 주인공으로부터 방출당한 심정이었다.

책을 덮으면, 내가 처한 현실이 더욱 암울하게 여겨졌다. 저 문밖에는 무서운 할머니가 있고, 못된 동생이 있고, 야단을 맞거나 구박을 받아야 하는 일 천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독서에 빠져들었던 것은 일종의 현실도피였던 셈이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런 가정법 뒤에 오는 나의 소원들은 항상 여행에 관련된 것이었다.

‘가방에 초콜릿과 필름을 한가득 채우고 길을 나설 거야. 세상의 모든 하늘을 다 찍고 필름이 다 떨어지면 그 때 돌아와야지.’

뭐 이런 낭만적인 꿈이라든가.

‘스무살이 되면 인도로 배낭여행을 갈거야.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와 같은 야무진 계획까지. 간절한 소원은 이뤄진다던가. 아니면 내 불굴의 의지 덕분이었을까. 실제로 나는 스무살 때 내가 소원하던 형태의 여행을 두달이나 해볼 수 있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험은 정말이지 황홀했다. TV에서나 보던 이국적인 풍경이 내가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한 공간에 펼쳐져 있다니. 두 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인도 곳곳을 떠돌며, 이 행복한 시간이 영원히 계속될 수만 있다면.... 간절히 꿈꿨다.








여행은 결국 돌아오는 것

돌아오는 비행기 안, 멀어지는 뭄바이 시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흘리던 눈물을 기억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축제의 시간은 끝났다. 한국은 여전히 같은 속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돌아왔으니 얼른 적응해야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인도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고, 인도에서 사 입었던 옷과 액세서리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하고 다녔다. 맨바닥에 걸터앉기도 하고 우산도 없이 비를 맞거나 맨발로 걸어 다니기도 했다. 여행이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린 영혼의 방황이었다. 괴로운 한 학기를 보내고 허겁지겁 다음 방학 때는 유럽으로 떠났다. 그러면 뭘 하나. 결국 돌아와야 하는 걸.










여행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내가 마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고, 인물들의 감정을 공유하며 실제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놀라운 세계를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독자는 그저 읽는 사람일 뿐. 책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결국 책을 덮고 나의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 삶에 주어진 숙제를 하나씩 해나가야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공간에서 자고, 먹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보면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수도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나에게는 환상이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매일 반복되는 삶의 한 조각. 나에게는 한폭의 예술이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풍경. 이를 바꾸어 말하면, 이 멋진 여행이 일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결코 멋지지도 예술이지도 않을 거라는 것.

감동적인 책을 읽고 먹먹한 가슴을 다독이며 책장을 덮는 그 마음처럼, 나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한달에 가까운 배낭여행을 매년 하고 있고, 적어도 일년에 서너번은 해외에 나간다. 어쩌다보니 습관적인 현실도피를 일삼게 된 셈이다.

뭐 대단한 현실이라고 잠깐 도망치는 게 어때서. 알아. 다시 돌아오겠지. 어차피 지어낸 얘기에 불과한 소설을 읽으며 울고 웃고, 어차피 돌아올 여행에 돈과 시간과 마음을 쓰는 것. 아름답지 아니한가. 어차피 우리는 배고플 건데 매 끼를 먹어대고, 결국엔 죽을 건데 살고 있지 않나. 그게 삶이잖아.







홍아미

여행 에세이스트. <지금, 우리, 남미> 저자. 20살 홀로 떠난 인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25개국 100여 개 도시를 누빈 중증의 여행중독자, 라고 하지만 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하는 30대 여자입니다. 거창한 세계일주도, 럭셔리 여행도 아닌, 그저 일상 속에 내가 원하는 여행을 녹이는 법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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