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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Jan 17. 2018

나는 후회한다

여행을 하면서 곳곳에 흘린 후회의 기억들



무거워진 마음이 걸음을 느리게 하는 순간이 있다. 그 찰나가 오래 가슴속에 남아 다시 그곳으로 날 데리고 간다. 








우리는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에 있는 태양의 섬을 걷고 있었다. 잉카 문명의 발원지, 온갖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천혜의 섬. 해발 4000미터.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양을 향해 우뚝 솟은 이곳에서 아이마라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삶을 고수하고 있었다. 차도 다니지 않고, 똑같이 생긴 콘크리트 건물도 없는 곳. 사방이 호수 아니면 초원, 풀을 뜯는 노새와 염소, 돌을 쌓아 만든 목가적인 풍경뿐이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 양떼를 몰고 있는 지나가는 어린 소년을 보고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반은 장난 삼아, 신이 나서 “올라!”하고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함께 인사해주던 소년에게서 들린 말 한마디 “꼬메”. 

‘먹다’라는 의미가 담긴 스페인어였다. 짧은 스페인어로 배가 고프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그렇다고 답했다. 현실 속 양치기 소년은 내 상상과 달랐다.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하던 우리들은 배가 고프다며 가까이 다가온 아이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정오의 눈부신 햇빛이 괴로운 지 아이는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씻지 않아 얼굴은 꾀죄죄했다. 분명 형이나 누군가에게서 물려 입었을 후드티는 언뜻 보기에도 너무 작고 낡아 보였다. 

그때 강렬하게 든 감정 중 하나는 나의 챙 넓은 모자를 그 아이에게 씌워주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아, 왜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이는 그 자리에서 계속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분명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이 오래 잊히지 않았다. 








미련이나 후회가 많은 성격은 아니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때론 꽤 중요한 일도) 별 것 아닌 듯 넘기고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유독 오래 남는 기억들은 후회되는 순간들이다. 큰 사건도 아니고 아주 사소한 해프닝 같은 것들.

잉카 유적지를 관람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들었던 피리 연주를 기억한다. ‘엘 콘도르 파사’. 마추픽추 등 페루의 잉카문명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배경음악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페루의 자연 풍경이 창밖으로 지나가는데 고운 피리 라이브로 그 음악을 듣노라니 가슴에 꽉 차오르는 감동. 피리 연주의 주인공은 이날의 투어를 책임져 준 가이드였다. 수준급의 연주를 하는 것을 보니 음악을 하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팁을 줄까 말까 하다가 남들이 다 그냥 지나가기에 나도 그냥 지나쳐오고 말았다. 아니 사실 몇 번 뒤를 돌아봤다. 다시 돌아가서 ‘너의 음악이 나에게 큰 행복을 주었다’고 이야기하며 다만 얼마라도 팁을 쥐어줄 걸. 또 두고두고 후회.

스페인 세비야를 여행할 때였나. 슈퍼에서 한 할머니가 돈이 없어 바나나를 한 송이 다 사지 못하고 두 개만 사가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본 적이 있다. 자세히 보니 얼마 전 길가에서 구걸하던 모습을 본 기억이 났다. 구걸도 신성한 노동의 한 부분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벌어서 먹고사는 것. 거지나 재벌이나 우리나 다 똑같은 거 아닌가. 어쨌든 원하는 음식을 사기에 돈이 모자라다는 것을 확인한 할머니는 쉽게 물러섰다. 천천히 되돌아가는 그 모습이 오래 잊히지 않았다. 빵 하나라도 사서 쥐어드릴 걸. 바나나 한 송이를 다 살 수 있게 모자란 돈을 대신 내줄 걸. 두고두고 그 할머니의 작은 뒷모습을 떠올렸다. 









여행을 하면서 여기저기 후회의 기억들을 뚝뚝 흘리고 다닌다. 어디 여행뿐이겠는가. 지나온 삶의 순간, 순간에도 그런 후회와 미련의 더께가 묻어 있다. 뒤돌아 조용히 울음을 삼키던 그 친구의 등을 보며 ‘다가가서 꼬옥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떠나가는 버스를 헐레벌떡 따라오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아줌마를 창밖으로 바라보며 ‘아저씨한테 버스를 세워달라고 말할까’라고 생각하다가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뭔가를 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이 훨씬 많다는 것도. 그 찰나가 지나가도록 가만히 있지 말아야 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양치기 소년에게 다시 뛰어가 내 모자를 벗어 푹 씌워주며 “Mi Regalo(미 레갈로, 내 선물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원주민 가이드에게 “너의 음악은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며 팁을 주고 싶다. 할머니의 바나나 값을 대신 내주고 싶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그런 일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라는 거짓말은 죽어도 못하겠다. 앞으로도 아마 나는 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죽을 때까지 후회하면서 살아가겠지. 애초에 인생이 어디 가벼운 것이었던가. 무거운 마음을 질질 끌며 또 빚을 지고, 미안해하고, 더러는 갚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고. 

방법이 없다. 








홍아미

여행 에세이스트. <지금, 우리, 남미> 저자. 20살 홀로 떠난 인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25개국 100여 개 도시를 누빈 중증의 여행중독자, 라고 하지만 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하는 30대 여자입니다. 거창한 세계일주도, 럭셔리 여행도 아닌, 그저 일상 속에 내가 원하는 여행을 녹이는 법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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