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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Jan 31. 2018

소녀, 집을 떠나다

조금 특별했던 첫 방랑기



굳이 해외여행에 한정하지 않는다면, 내 생애 첫 여행은 인도가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 맞은 그해 겨울,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운동화를 신고,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건넨 만 열아홉의 소녀는 길을 떠났다.





  

낯선 곳을 향한 갈망

유례없이 추운 겨울이었다. 두꺼운 오리털 파카에 가방 하나를 멘 나는 홀로 가평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인천에서 상봉역까지 가는 데만 지하철로 두 시간이 넘게 걸렸고, 상봉터미널에서 가평 꽃동네행 버스를 타고 또 한참을 가야 했으니 꽤 험난한 길이긴 했다.

그 해 겨울 나는 겨울방학을 가평 꽃동네에서 보내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래, 젊었을 땐 그런 고생도 해봐야 되는 거야.” 무려 한 달씩이나 집을 떠나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딸의 선언에 아버지는 단 한 마디 말로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지내는 것은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봉사활동은 핑계였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이 없는 낯선 곳이라면 그 어떤 곳이라도 좋았다. 나를 구속하지 못해 안달인 가족들, 미안하고 답답한 마음만 한 가득인 연인, 기타 등등 모든 관계에 염증이 났다. 한편으로는 그런 나 자신이 밉고 짜증이 났다. 휴대폰도 들고 가지 않았다. 최소한 한 달 동안은 날 옭아매던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벗어나 철저하게 혼자이고 싶었다. 정신이 쏙 빠지게 일하면서 스스로를 학대하고도 싶었다. 어쩌면 이건 약간은 중2병 같은 감상으로 떠났던 방랑기 이야기다.





또 다른 일상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원장수녀님과 면담을 한 후 나의 소임지로 배정받은 곳은 ‘사랑의 집’이었다. 정신장애, 지체장애, 호스피스 병동 등 장애의 종류에 따라 환희의 집, 희망의 집, 평화의 집 등으로 각각의 건물이 나뉘어 있었는데 사랑의 집은 일종의 부랑자 시설이었다. 거리에서 갈 곳을 잃은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장애가 있는 사람,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사람 등 장애의 정도도 나이도 다양했다. 수녀님으로부터 개략적인 설명을 듣고, 한 달 동안 묵을 숙소도 배정받았다. 2층 침대가 2개씩 있는 방이 여남은 개 있는 장기봉사자 숙소도 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랬다. 일단 꽃동네에 들어서자 낯선 곳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어쭙잖은 감상은 집어넣어야 했다. 한방을 쓰는 봉사자 언니들과 잘 지내야 했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미사를 드려야 했으며, 식사시간에는 밥풀 한 톨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해서 먹어야 했다. 무엇보다 100명이 넘는 가족들의 이름을 외고 적응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규칙적이고 바쁜 일상이었다. 

거동을 못하는 마비 환자에게 밥과 반찬을 잘게 잘라 먹여주고, 약 시간에는 마치 출석부 체크를 하듯 약을 주고 제대로 먹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비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단기 봉사자들에게 할 일을 나누어주는 역할도, 일주일에 몇 번씩 차에 태워 병원에 오가는 일도 내 몫이었다. 나는 이제 막 스물이 된 풋내기였다. 내가 낯선 곳에서 이런 일을 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괜찮았다. 예상 밖의 미래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다른 세상 속의 나

율리아. 그들에게 불렸던 내 이름이었다. 율리아, 율리아! 여기저기서 율리아를 찾아댔다. 약을 분류하거나 상태를 기록하기 위해 관리실에서 사무를 보고 있으면 수시로 가족들이 찾아와 어디가 아프다, 놀아달라, 뭐하냐 참견을 해댔다. 일이 없는 오후엔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장난을 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내 머리를 빗어주겠다며 어설프게 묶어놓기도 했다. 바쁘고 분주했다. 내가 이전에 살던 세계가 그만 아득했다. 이들과 서로 보듬고 돌보면서 평생을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한 숙소를 썼던 장기봉사자 언니들과도 매일 밤 많은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쌓아갔다. 한 50대 언니는 벌써 몇 년째 봉사 중이었다. 무슨 사연인지 이혼을 하고 수중에 택시비밖에 없을 때 절에 들어갈까, 꽃동네를 갈까 하다가 꽃동네를 선택하게 됐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평온하던 그 표정을 기억한다. 그걸 보면서 언젠가 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그런 나라도 받아줄 곳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건 꽤 안심되는 일이구나 생각했다. 그런 곳이 이곳 사랑의집이라면,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사는 일이 무섭지는 않겠다 싶었다.

매일 정해진 일과가 있었고, 매주 병원 스케줄, 다양한 이벤트 등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지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녀님의 추천으로 성소자 피정을 다녀오느라 폭설을 뚫고 충북 음성에 가다가 시골 버스터미널에 잠시 고립되기도 했다. 나무로 불을 때는 오래된 난로에 몸을 녹이다 히치하이킹으로 가까스로 곤경을 벗어났던 기억. 그 모든 일이 어린 소녀에게는 두근대는 모험의 연속이었다.

마치 꿈같았던 겨울이었다. 세상 밖의 내가 진짜인지, 꽃동네의 율리아가 진짜인지 나중에는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살아갈 힘이 생겼다. 진짜 나로 살아갈 자신이 생겼다. 나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눈길

지금도 눈을 감으면 마지막 날, 그날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눈가가 잔뜩 붉어진 채 인사를 하러 온 나를 베드로 수녀님은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이건 사랑의집 가족이 만들어준 건데....”하며 하얀 종이를 접어서 만든 30cm 정도 높이의 커다란 학 인형을 선물로 주셨다.

꾸벅 인사를 하고 건물 밖을 나오니 한 시간여 만에 눈이 아무도 밟지 않은 채 너무도 곱게 쌓여있었다. 눈은 그쳤지만 간간히 흩날리는 서리가 공기 중에 반짝였고,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외딴곳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였으나 외롭지 않았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다독이며 숨을 크게 몰아쉬었고, 하얀 입김이 하늘 위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버스정류장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내리막길. 아무도 없는 길 위엔 나의 발자국만이 길고 외롭게 찍혀있을 뿐이었다. 가슴에 하얀 종이학 인형을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 밟는 소리가 뽀독뽀독, 나며 들썩이는 작은 어깨를 다독여주는 듯했다. 그때의 그 벅찬 기분은 지금도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슬프고, 기쁘고, 행복하고, 먹먹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느꼈던 순간.

첫 방랑은 그렇게 끝났다. 



 




홍아미

여행 에세이스트. <지금, 우리, 남미> 저자. 20살 홀로 떠난 인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25개국 100여 개 도시를 누빈 중증의 여행중독자, 라고 하지만 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하는 30대 여자입니다. 거창한 세계일주도, 럭셔리 여행도 아닌, 그저 일상 속에 내가 원하는 여행을 녹이는 법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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